1983

세 가지 발견

by 삶의언어 posted Jun 15, 2024 Views 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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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전도/선교
예배드린 날 1983-03-06
오늘의 성구 갈라디아서 1장 11절로 17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YIf9Wm9HP5o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저는 오늘 '세 가지 발견'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새로운 발명과 발견은 홍수처럼 매일이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이와 같은 발명과 발견으로 말미암아 생활이 변모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명과 발견은 모두다 일시적이고 물질적이며 환경 적인 변화 이외의 그 이상의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와 같은 물질적인 발명이나 발견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변화도 되지 않고 그 문제의 해답도 제시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해드리려는 이 발견은 여러분과 나의 운명과 우리 존재의 바탕의 위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역사를 유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이와 같이 크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까요?

첫째로, 우리가 발견해야 될 것은 내 자아가 잃어버린 존재란 것을 발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에 취하여 있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의 늪에 빠져 허우적이며 정신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양손에 먹을 것을 잔뜩 쥐고 그리고 즐겁게 혼자서 재잘재잘 하면서 수풀 속에 걸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깊이 숲 속에 들어갔었습니다. 이제 해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날이 추워집니다. 어린 아이는 갑자기 자기가 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 어린 아이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아무리 예쁘더라고 그가 손에 음식을 잔뜩 들고 있을지라도 그런 것이 마음 속에 조금도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절망에 처하여 앉아서 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오늘 모든 인간들은 자아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입고 잘 있고 잘 살아도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방랑자의 불구 한 것입니다. 자기가 방랑자요 잃어버린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가 잃어버린 자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것은 더 크나 큰 슬픔이요 절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실상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절망의 숲 속에서 버림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이 버림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은 죄 책의 숲 속에서 버림을 받고 방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람들 앞에 갑자기 삶의 위기나 죽음이 다가오면 양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양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양심은 우리의 일생에 지어온 죄악에 대해서 정확하게 죄 책을 주고 비난하고 공격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이 있다고 믿던 없던 상관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양심을 영원히 짓눌러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의 생에 속에 갑자기 삶의 위기가 다가오고 그가 급박한 일을 당했을 때는 반드시 양심의 소리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죄 책이 그 영혼을 심히 책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 이 무서운 죄 책에서 놓아줄 수 있습니까? 죄 책의 숲 속에 빠져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용서받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허무와 무의미의 숲 속에서 빠져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뒤쳐지고 괴로울 때는 갑자기 여러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먼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탁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애쓰고 힘쓰고 사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내가 살아갈 가치와 목적이 무엇일까?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죽고 싶다고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갑자기 삶이 허기증이 나고 삶이 잿빛처럼 아무 취미도 없어지고 삶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삶이 지치고 괴로울 때 사람들이 느끼는 허무와 무의미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속에 앓고 있는 병인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사람들은 누구를 불구하고 다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 모든 것이 일체 무로 돌아간다는 공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시린 원한인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 속에서 우리의 나이 많은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납니다. 혹은 우리의 친구들 동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세상을 떠납니다. 우린 그들의 죽은 시체들을 보고 그들의 장례 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땅 속에 관이 내려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상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도 어느 때 저 관에 담겨서 저 장의 차에 실려서 나도 저 흙 속에 파묻히고 말 것이다. 죽음의 공포, 무의 대한 절망 이것은 사람들이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길 잃어버린 절망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벌거벗은 상황에 있는 인간이 자기가 벌거벗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더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들은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벌거벗은 수치를 면해보려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앞치마를 해서 입었습니다만 입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뜨거운 햇빛이 쨍쨍 내리 쬐니깐 그 나무잎사귀는 모두다 시들어 버리고 쭈글쭈글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벌거벗은 수치를 그 무화과 나뭇잎으로 감춰버리려고 해도 감춰지지가 않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간의 비극인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놀라운 발명이나 발견 그 과학의 속도와 물질적인 환경의 부요의 무화과 나뭇잎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견이다. 발명이다. 과학이다. 물질이 부요라는 무화과 나뭇잎을 자기고서 자기의 운명적인 절망의 벌거벗은 상태를 가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책을 가려보고 허무와 무의미를 가려보고 죽음과 무의 절망과 공포를 그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려보려고 해도 오늘날 인간의 과학이나 발명이나 발견이나 물질의 부요가 죄 책의 숲 속에서 우리를 끌어내 주지 못하고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서 끌어내 주지 못하며 죽어 가는 사람 조금도 죽음에서 끌어 내주지 못하고 무로 돌려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인간들은 그 발가벗은 그 실상을 신속히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와 같이 '벌거벗은 존재다. 잃어버린 존재다. 오늘날 인간이 지식이 아무리 발달하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우리 환경이 아무리 부유하게 되어도 이것은 한 낱 무화과 나뭇잎에 불과하다. 나는 절망적인 존재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위대한 발견이요 위대한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난 부유하고 나는 부귀가 꽉 들어차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인간이 걸려있는 죽임에 이르는 절망의 병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으면서도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절망적인 것입니다. 열심히만 살면 된다. 그리고 과학적인 발명, 발견을 하고 생활만 부유하게 하고 살면 문제가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인 것입니다. 죽음의 걸려있는 택시 운전사가 택시 엑셀을 밟아서 속도만 빨리 내면 문제가 해결되겠지 하고 자기는 방금 죽어가면서 전력을 기울여 고속도로를 질주한다고 해서 죽어 가는 자기의 존재가 살아날 일은 만무한 것입니다. 속도가 그 택시 운전사의 절망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과 인류 문명의 발전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서 그 속도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도를 내는 인간 자체는 죄 책과 허무와 무의미와 죽음과 무의 절망의 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 병은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없이 절망이라는 것을 일찍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이것이 위대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발견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생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왔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이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은 물어봐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자기의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는 멸망의 길이 있고 영생의 길이 있고 그 길을 판단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앞에서 우리가 멸망을 선택하던지 영생을 선택하던지 둘 중에 하나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그의 비상한 탄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주인 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남자의 후손이나 여자는 남자의 후손으로 예수님은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하신 말씀으로 '여자아이 후손이 태어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겠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은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해서 태어나서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고 마귀의 권세를 격파한 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죄인의 죄를 사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나 죄인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르는 곳마다 병자를 고쳤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미워했었습니다. 귀신을 미워했었습니다. 그러나 병든 자나 귀신 들린 자는 사랑하사 주님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자를 먹여 주었으며 절망에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고 죽어 가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주로서의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종교적인 의식이나 철학이나 심오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당하고 절망에 처하여 죽어 가는 사람들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의 생애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건지는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로마의 법률과 유대인의 종교에 잡혀서 정제를 당하고 인간이 죽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죽었었습니다. 가장 극악한 죄수가 죽는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서 그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버림을 당하고 죽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했던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조차도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통곡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그가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위대하게 부활하사 하늘나라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길이 멸열하여 흩어져 가는 제자들을 주님께서 동에서 나타나시고 서에서 나타나셔서 그들을 모아서 오순절 날에 하늘에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길이 멸열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 일어나서 그들은 5대양 6대주로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여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하게 채어놓았으니 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행복이요. 우리에게 생사의 문제를 간음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그리스도가 무엇 때문에 왔으며, 무엇 때문에 그 놀라운 사역을 하셨으며, 왜 죽었으며, 왜 부활하셨으며, 그리스도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점을 반드시 한번은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멸망이냐 영생이냐를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 이것은 여러분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발견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과 내가 발견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결단해서 우리의 생애 속에 구주로 모셔 드리면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는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위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발견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30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마음 속에 모셔드릴 때 나에게 어떠한 변화가 다가올 까요? 인격의 바탕 속에 어떠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적인 역사가 다가올까요?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지혜가 된다고 말했었습니다. 예수를 내 구주로 모시기 전에는 나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본주의자가 되어서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인간은 아메바에서 다윈의 진화론 식으로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으며 그 다음 유물주의 자로서 죽고 나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고 인간은 없어지고 만다고 생각한 무지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모시자 예수께서 나의 지혜가 되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아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자마자 여러분은 즉시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여러분과 내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이것을 밝히 알아서 인생의 좌표가 뚜렷하게 되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나에게 위대한 지혜가 되십니다. 그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갈 때 주님께서 끊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총명과 하나님의 분별력을 주셔서 마귀의 올모와 탐욕에 빠져서 파멸 당하는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을 말씀하기를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아니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아니하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겠다'거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나의 의의가 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스스로 의롭다함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게 될 때 여러분과 나는 머리털보다 많은 죄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죄악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를 부끄러워 돌아볼 수가 없고 현재를 내가 내려다 볼 수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자신과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여러분과 나의 의의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과거의 죄, 나의 현재의 죄,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속하는 제물이 되어서 그는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재단에서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이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제물이 되어서 유한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모두다 청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했었을 때 헬라 우르는 테테 레스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테테 레스타이라는 의미는 내가 하나도 없이 다 청산하고 지불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깡그리 남김없이 주님께서 다 지불해 버리심으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때 예수께서 나의 영원한 의로움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상태요.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요. 마귀에게 참소를 당하지 않는 그러한 자격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또한 나의 거룩함이 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살 동안에 죄악의 포로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수가 없습니다. 죄악이 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을 잡고서 포로로서 사람을 끌고 가기 때문에 죄에서 헤어나올 도리가 없습니다. 죄를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우리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 마귀에서 놓여져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마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안식일을 거룩이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이웃을 거짓 증거하지 마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는 이와 같은 거룩한 하나님의 십계명을 우리는 쉽게 마음속에 받아드려서 이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우리 속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나의 거룩함이 되셔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지해서 우리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계명을 지키고 우리와 이웃 간의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인 계명을 지켜서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생각을 하고 거룩하게 말을 하고 거룩하게 일하고 거룩하게 활동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성은 자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만이 나의 거룩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 없이 여러분과 나는 육신의 정욕이나 죄악의 포로에서 놓여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나의 구속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구속이란 것은 영어로 리뎀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종으로 팔렸을 때 그 종의 대가를 다 지불하셔서 다시 자유인으로 사주신 것을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나의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으로 팔아버렸는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가를 지불하고 난 다음 다시 사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고 그리고 난 다음 에덴에서 좇게 나갔을 때 인간은 이미 종으로 팔린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종으로 팔렸었습니다. 인간은 마귀의 종으로 팔렸었습니다. 인간은 질병의 종으로 팔렸었습니다. 인간의 저주의 종으로 팔렸었습니다. 인간은 영원한 멸망의 종으로 팔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제 나의 구속함이 되셔서 그리스도의 그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가 속전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흘려 내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깨어진 몸과 그 흘리신 피가 나에게 속전이 되어서 이제는 나의 이 종의 생활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그들의 생활 중에는 아직까지 종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라고 말합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기를 ' 네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했었으며 '예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어서 노예 생활에서 놓여났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5장 1절엔 '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었으니 그러므로 믿음의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오늘 단호하게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속이 되셨으므로 나는 죄에서 놓여남을 받았으며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을 얻은 것은 단호하게 알고 주장해야 될 것이요. 병에서 나는 놓여남을 받았으므로 다시는 병의 쇠사슬에 묶여서 종노릇하지 아니할 것을 겸심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이 사슬을 끊어버려야 될 것이요. 마귀의 종살이에서 벗어났음으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마귀와 귀신을 내어쫓고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가졌음으로 원수의 능력에서 놓여남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여러분과 나는 저주의 삶에서 해방을 얻어야 됩니다. 언제까지나 저주의 가시에 찔리고 휘휘 감겨서 하는 일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가난과 쪼들림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남에게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는데 줄 겨를도 없고 아무것도 주의 사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늠름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를 원한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으며 저가 ???가난한 자에게 주었은즉 그 의의가 영원히 있다고 말씀하였으며 성경에는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는 복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는 자가 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저주에서 놓여남을 받아야 될 것인데 예수께서 우리의 속전이 되사 십자가에서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형제 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 믿지 않은 자와 같이 절망 탄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오실 때 그들을 다시 데려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실 때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들도 변화되어 주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지금 단지 죽음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서로 헤어진다 하더라도 잠시 잠깐 후에 주께서 오실 때 그 날에 부모 형제 자매 친구 친지들이 모두다 함께 만나는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슬픔은 믿지 않는 자와 같이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잠깐동안의 이별의 눈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이와 같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여러분 오늘 이 시간부터 얼마나 위대한 삶을 예수 안에서 살 수 있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과 나는 이제 예수 나의, 예수 나의 거룩함, 예수 나의 구속, 예수 나의 지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고아가 되지 아니하고 버림받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고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밝히 알고 나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인복주의 적 자아의 절망을 발견하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엔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여러분 위대한 새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발명과 발견, 물질적인 부유 부요와 변천도 일시적이고 사회적이고 환경 적이고 물질적인 변화는 가져올지도 몰라도 죄 책과 정제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아 절망에 처한 인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고칠 수고 없고 근원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없는데 자아를 발견하고 예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나는 완전히 치료받은 새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 책과 정제에서 벗어나고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나오며 죽음과 무를 짓밟아버리고 위대한 인생으로서의 창조적인 삶을 살아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일시적이나 환경 적인 아닌 영원하고도 존재 적인 바탕에서 일어난 변화이며 이 변화를 통해서 참 행복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기 도-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은 다함께 모여서 우리 인간에 대한 세 가지 사항을 발견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으로 나누었었습니다. 얼마나 자기가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발견하고 예수께서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어떠한 인간이 되는가를 발견하고 진실로 일어버린 존재가 발견된 존재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