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나의 정체성

by 삶의언어 posted Jun 24, 2024 Views 1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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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그리스도인
예배드린 날 2009-08-30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5장 16절로 2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sDdz8pomaa0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6∼21절

 

불신자의 정체성은 죄·허무·죽음뿐이지만
예수 믿으면 오중복음·사중신분으로 거듭나
우리의 정체성을 알고 그 위에 굳게 서야


 제가 젊을 때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큰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한국계 여성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꼭 좀 만나달라고. 그래서 아침식사를 같이 하게 됐는데 젊은 여성입니다. 제가 볼 때 한 35세쯤 돼 보이는데 굉장히 현명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를 좀 찾아 주십시오. 내가 누굽니까? 나는 한국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프랑스 양부모에게 입양돼 프랑스에서 자랐습니다. 한국말을 모르고 프랑스를 모국으로 알고 프랑스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시집은 영국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영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얼굴은 한국 사람의 얼굴이고 문화는 프랑스 문화를 가지고 있고 살기는 영국 남자하고 살고 있으니 도대체 너는 누구냐?’ 마음에 굉장한 고민이 있습니다. 내 정체성을 모르겠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가 싫어서 버린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알아야 내 뿌리를 찾겠습니다. 내가 진짜 한국 사람으로서 프랑스에서 자라 영국 남자하고 산다는 확실성을 가지고 싶습니다. 지금같이 공중에 뜬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날 좀 찾아 주십시오” 그러나 찾아보려고 해도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태어난 번지수도 도시도 날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성함도 모릅니다. 국민일보에 좀 찾아보라고 하니까 기자들이 전부 입을 딱 벌리고 “하나님이나 찾을까 사람은 못 찾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1. 불신자의 정체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인간은 죄책의 절망을 가진 존재이며, 둘째,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존재로서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우연히 태어나서 허망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이고, 셋째, 인간이란 죽음과 무(無)의 절망을 품은 자이므로 절망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머리를 짜내어 ‘내가 누구인가’를 연구해서 발표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죄를 짓고 죄책으로 고민하는 존재이다. 나는 누구인가? 허무하게 태어나서 허무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허무의 존재이다. 나는 누구인가? 죽음과 영원한 무의 존재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실존주의 철학의 대답은 불신자의 정체성이 어떤 모습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불신자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허무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높은 지위를 가지고 명예와 부귀와 영화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갑니까? 솔로몬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항상 젊을 수 없고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고 항상 부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마음의 죄와 정죄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번에 저는 한 이틀 시간을 내어서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입니다. 그런데 너무 변하고 개발이 돼서 이제는 옛날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옛날에 살던 집을 발견했는데 마음에 굉장한 슬픔이 다가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 뛰놀던 그곳이 너무나 황량하고 모든 것이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만 뚜렷이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폐결핵에 걸려서 죽다가 살아난 기념으로 아버님께서 백일홍 나무를 심으셨는데 그 나무는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서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허무와 무의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덤에 가니까 풀만 무성하게 나있고 아무 음성도 없습니다. 살아 계시면 “아이고, 용기야 오랜만이다. 잘 왔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인데 아무 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적막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50∼60년 후가 되면 내 후손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지도 않을 것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허무와 무의미 아닌가. 살아있는 지금도 꿈같은 인생이지만 세월이 지나가면 결국 모든 것은 잊혀지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은 죽음의 슬픔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전부입니다.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을 자랑하고 청춘을 노래하고 자랑한다고 해도 결국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릴린 먼로가 죽을 때 남겨 놓은 유서에는 “나는 한없는 사랑을 받기 원했다. 그러나 나를 한없이 사랑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한없이 사랑해 주는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은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한 무신론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밥 먹고 일하고 먹고 자고 깨다가 어느 날 보니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영이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그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늘 마음속에 죄와 죄책과 허무와 무의미와 죽음과 무의 슬픔 속에서 고뇌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고뇌하는 사람은 상당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뇌도 안합니다. 그저 현실에 잡혀서 자고 깨고 먹고 자고 깨고 먹고 하다가 그냥 죽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나를 찾게 됩니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이 갈보리 십자가 밑에 와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 나를 잃어버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디도서 3장 6절로 7절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너는 하늘나라의 상속자다. 하나님 아버지가 지으신 이 천지만물의 상속자가 바로 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치료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내 영도 마음도 몸도 생활도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저주에서 해방시켜 준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날 때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됐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 저주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주에서 해방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우리가 또 발견하는 것은 부활, 천국, 영생을 얻는 내가 됐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할 것입니다. 천국은 내가 영원히 살 고향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내가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서 예수님 안에 있게 될 때 비로소 죄와 죄책,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고통, 죽음과 무의 슬픔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영생복락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성령이 같이 계신 사람이다. 나는 치료받은 사람이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활 영생 천국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은 죄와 죄책,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인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함 받은 자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해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됐습니다. 옛날에는 마귀가 나를 다스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니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망 안에서 종노릇 하지 않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서 내 자신이 하나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됐습니다. 말라기 3장 17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들도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것들은 보통 소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소유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보시는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혼란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항상 우리의 정체성을 밝히 알고 그 정체성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3. 정체성 안에 굳게 서는 길

 우리는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하고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는 그저 죄인이다. 허무한 인생을 산다. 죽으면 그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옛날 죄인의 생활은 지나갔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하고 새사람이 된 것을 상상하십시오.

 에베소서 4장 23절로 24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의를 가진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치료받고 건강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형통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부활 영생 천국의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가 새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이 된 자기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됐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늘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육신이 약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폐병 3기로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그 이후로도 늘 몸이 허약했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아프고 기침이 나오고 소화가 잘 안되고 온갖 병이라는 병은 다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주의 종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항상 몸이 아팠습니다. 서대문에서는 설교하다가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후로도 늘 쓰러질 것 같이 다리가 떨리고 괴로웠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하나 배운 것은 나의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냐? 성경에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나은 사람이다. 마귀가 아무리 와서 나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은 사람이다’ 50년의 목회생활 동안 한국과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수없이 심장이 멈출 것 같고 숨이 끊어질 것 같고 어지럽고 일어날 기운이 없고 그럴 때도 항상 저는 제 정체성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을 안 믿고 세상에서 살 때는 죄책과 정죄,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의 노예가 돼서 끌려 다녔지만 지금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나는 용서받고 의롭게 된 사람이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고 영생 복락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진실한 정체성이니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설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불확실한 사람은 마귀가 마음대로 끌고 다닙니다. 마귀가 속이는 거짓말을 하니까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불안, 초조, 절망, 고통으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항상 희망차고 승리합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나를 힘차게 붙잡고 나 자신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가 누구냐?’라고 질문하고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영국에서부터 파리로 와서 ‘나를 찾아 달라’는 그 부인의 하소연을 들어 보십시오. 자기를 찾지 못하니까 마음에 불안과 고통, 괴로움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찾아 달라고 하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를 찾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이다. 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너는 내 아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다. 너는 내 아들이 저주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너는 죽더라도 부활하고 승천해서 나와 더불어 영원히 살 사람이다. 이것을 믿느냐? 이것을 아느냐?” 이렇게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체성을 알고 그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그렇다면 안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꾸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다고 하셨으면 나았다고 말해야지 안 나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하신 말을 왜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보다 큽니까? 하나님이 안하신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말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돼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죽지 하나님이 하신 말씀 이외의 말은 안 믿는다” 이 절대 진리를 확실히 믿고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박수쳐 주시고 밀어주시고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이 불확실하고 불명확하여 불분명한 사람이 돼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도와주셔서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 되어 늘 마귀와 운명과 환경을 지배하고 이기는 승리자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