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

말세에 고통하는 때

by 삶의언어 posted Jun 20, 2024 Views 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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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재림/종말
예배드린 날 1985-06-30
오늘의 성구 디모데후서 3장 1절로 5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lCsspakSkKQ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말세에 고통 하는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고통이라는 단어에 벌써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그 고통을 즐거워해서 고통을 환영하고 고통 속에서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삶의 평안과 기쁨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말세에는 고통 하는 때가 다가온다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고통도 인간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고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끝임 없이 자기 반성을 하고 회개하고 인간 생활에 변화를 받음으로 이 고통을 제거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말세에 어떠한 고통이 인간성의 타락으로부터 다가올까요?

첫째로, 잘못된 사랑이 가져온 고통에 관해서 바울 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세에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하면 그 사랑은 악마의 사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은 사랑이 비뚤어져서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르면 이것은 악마화 된 사랑인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요셉 멘겔은 유대인 40만 명을 죽이는데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시험도구로 삼든지 안 그러면 가스 채운 방에 넣어서 처형하고 그 이후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구라파를 전전하고 그 다음 남미에 가서 숨어살았지만 그 아들이 가끔 만났는데 그 아버지는 유대인 40만을 죽인 자기 행위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기주의적인 자기만 사랑하는 악마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분 우리 신문에 보니까 부산에서 한 운전기사가 자기의 정부의 남편을 죽여서 파묻고 그것을 눈치챈 자기 아내도 죽여서 매장을 하고 그리고 잡혔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니까 자기 정부의 남편을 죽이고 자기 아내를 죽여버리고 그 다음 자기 첩의 여자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기가 소유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무지하게 이기주의적인 것입니다. 자기 욕심만 채우면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은 어떻게 빼앗아도 좋다는 비뚤어진 사랑, 왜곡된 사랑, 부패된 사랑, 악마적인 사랑 이것이 자기만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정도 고통에 빠지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파멸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게 고통 중에 빠진 것은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빛에 비추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저울추에 놓고 사랑하게 되면 그러한 사랑은 창조적인 생명을 가져오고 행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만 생각하는 사랑은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 만일 여러분 가운데 어떤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나 사회인 치고 나만 사랑해서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 빠진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고통 당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가정과 이웃과 사회를 고통 속에 휘몰아 넣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뚤어지고 악마화 된 사랑을 우리가 회개하고 진실하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으로 돌아오게 될 때 고통은 사라지고 행복과 평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성경에는 잘못된 자기 평가가 가져오는 고통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지막 때에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자긍하기 때문에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자긍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남을 제치고 자기만 잘 낫다고 하고 그 때문에 남과 조화가 안되고 충고도 듣지 않습니다. 자랑이란 남이 칭찬을 해 주어야 진실한 칭찬이 되지 자기가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면 이것은 우습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기PR시대라고 해서 사람들마다 앞을 다투어서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든지 남을 제치고 자기만 잘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가정에 조화가 안됩니다. 남편이 자기만 잘 낫다고 하고 아내와 자식을 짓밟는가 하면 혹은 아내가 자기만 잘 낫다고 하고 남편과 자식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같이 살면서 자기 자랑을 하고 다른 이웃 동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가정의 조화 사회적인 조화가 깨어지고 고통 하는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든지 자긍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그 사람이 모든 조화를 깨뜨리고 분쟁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은 교만화 되어 있습니다. 건방지고 방자하여 순종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실 그렇게 잘나지도 못했는데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고 자기 분수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고개를 숙였어야 하는데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건방지고 방자해 가지고 남에게 순종하지도 아니하고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에게 배우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어깨를 으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 되고 거만한 마음은 멸망의 앞잡이가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한 가족단위나 사회나 국가라도 만일 겸비하게 낮아져서 배우기를 원하고 순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패망의 선봉이 되고 멸망의 앞잡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이처럼 고통과 괴로움 속에 꽉 들어찬 것은 더 많은 겸비하고 겸허하여 남의 충고를 듣고 스스로 낮추고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고 자기만 잘 낫다고 분수를 넘어서 자기 신분과 처지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람들은 이웃을 훼방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훼방한다는 것은 자기만 옳다고 하고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결점을 알고 자기의 잘못을 알면 자기 스스로를 회개하고 돌보는데 바빠서 이웃을 헐뜯고 비방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완전하고 자기는 흠 잡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언제나 완전한 자리에 얹어놓고 남을 형편없이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정황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훼방하는 이와 같은 것 때문에 고통이 다가옵니다. 훼방하는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온 가족이 고통 속에 빠지고 일가친척이 고통에 빠지는 것입니다. 화목하던 가족과 일가친척이 박살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회나 집단에도 훼방하는 사람이 있어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물고 뜯으면 그 단체가 쑥밭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다가오는 수많은 고통이 잘못된 자기 평가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는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제하여 버리면 개인이나 가정 사회나 생활에 고통이 사라지고 조화와 질서와 행복이 다가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성경에는 잘못된 대인관계가 고통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모든 윤리 도덕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관계를 맺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부모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효도하거나 공경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절대로 스승을 공경하거나 존경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고 자기 외에는 권위를 두려워하거나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짓밟는 사람이 어찌 선생을 짓밟지 아니할 것이요 사회에 나가서 기강을 지킬 턱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학교에 가서 청소년들이 혹은 대학생들이 선생 알기를 우습게 알고 조금만 마음에 어긋나면 선생에게 대적하고 혹은 선생에게 대결하는 이러한 것들은 벌써 가정교육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 선생이나 자기 상사를 공경하지 않는 무질서한 패륜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모를 거역하기 때문에 벌써 가정과 사회와 생활에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모든 윤리 도덕에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선생을 공경하고 높은 사람을 잘 공경하고 질서를 지키며 윤리 도덕을 지키며 사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못된 대인관계를 가져오는 이유는 감사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밝고 긍정적이 되게 하나 불평과 원망은 어둡고 부정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실컷 받고 난 다음에도 은혜를 은혜로, 감사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돌이켜서 비방하거나 원수로 갚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오늘 세상이 점점 삭막해지는 것입니다. 검은머리 가진 동물을 돕지 말라는 옛말처럼 사람 돕기가 겁이 납니다. 은혜를 베풀고 나면 반드시 은혜 받은 사람이 은혜 받은 만큼 원수로 갚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면 원수는 안 되지만 은혜 베풀고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오늘날 은혜 베푸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감사치 아니하기 때문에 은혜 베푼 사람에게도 고통을 가져오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감사치 아니한 삶 그것이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넷째로 보면 잘못된 성품이 가져오는 고통에 대해서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룩치 아니함으로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더러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생활 전체가 생각하는 것과 말이 더러워지므로 더러운 행동을 합니다. 더러운 행동이 들어오면 여러분 맑음이 깨어지고 그 결과로 고통이 안 다가오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물리적 환경에도 물이 부패하고 공기가 오염되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가정과 생활에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러움이 들어오게 되면 가정이 파괴되고 생활이 파괴되고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거룩치 아니한 생각을 우리 생활 속에서 내어쫓지 아니하면 행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성경은 마지막 때에 고통이 오는 이유가 사람들이 무정하다고 말했습니다. 남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관심합니다. 남편은 자기 생각만 하고 아내도 자기 생각만 하고 자식도 자기 생각만 하고 그리고 부모도 자기 생각만 하고 사회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자기 생각만 한다면 이 세상은 무정하기 짝이 없는 몰인정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만 입고 다른 사람은 이용가치로만 생각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가 이렇게 냉정하고 잔혹하게 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무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세에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다보면은 서로 마음에 부딪치는 것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의견도 불일치 할 수가 있고 마음에 서로 상처를 줄 수 있지만은 그러나 곧장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합을 해야 하는데 이 마지막 때가 될수록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고 원한을 품고 화해하기를 거부하고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일년이 가도 계속 물고 찢는 이와 같은 정신적인 상황이 말세의 상황이요 이와 같은 결과로서 남에게 고통을 가져오고 자기도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여러분 우리는 원통함을 곧장 풀어야 됩니다.
부부간에 좀 의견이 불일치해서 싸움이 났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고 서로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있으면 그런 가정은 냉담한 냉기가 꽉 들어차서 잘못하면 가정 전체가 바싹 파괴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에서 장로님간에, 혹은 재직들간에, 성도간에 서로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회개하고 돌아서서 서로 용서해야 될 것인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고 원한을 품고 화해하기를 거부하며 계속해서 서로 얼굴을 할퀴기 시작하면 그것은 스스로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며 기도가 상달되지 아니하며 스스로 고통을 당하며 남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생활 가운데 원통함을 곧장 푸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다보면 억울한 일도 당하고 원통함 일도 안 당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신속히 푸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 풀어야 원수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 당하는 것은 참소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남의 약점을 혹은 참말과 거짓말로 고소하는 것입니다. 참소는 마귀가 하는 것인데 마귀는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참소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것을 트집잡아서 주야로 하나님께 참소해서 그 사람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도움을 베풀지 못하도록 마귀는 참소하는 것입니다. 바로 참소는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의 성품을 닮아 가지고서 이웃이 어찌하든지 잘못되게 하기 위해서 그를 참소하는 것입니다. 참소란 여러분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날 참소 때문에 정치적인 분쟁이 생기고 참소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됩니다. 행복하고 잘 살아가는 가정도 시누이나 혹은 며느리나 그 누구가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참소하기 시작하면 그 온화하던 가정이 박살이 나 버리고 얼음장같이 차지고 투쟁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소해서 우리의 생활가운데 고통이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속에 참소해서 남의 약점을 참말과 거짓말로 고소하는 이러한 성품을 우리가 제쳐버리면 말세에 고통 하는 수많은 고통에서 우리가 해방을 얻을 수 있고 마음속에 큰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절제는 평안을 가져오나 극단주의는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을 내어도 절제해서 성을 내야지 예전에는 성이 난다고 해서 때려치우라고 당장 몽둥이를 들고 가산전체를 다 부셔버리고 그리고 당장 당신과 나와 오늘부터 돌아서자 이혼하자 이렇게 극단주의로는 나가지 않았는데 요사이는 극단주의로 나가요. 도둑놈도 여러분 요사이 경찰이 잡으면 당장 칼로서 찌르는 것입니다. 극단주의로 나갑니다. 그저 죽여놓고 보자. 파괴해 놓고 보자. 끝장을 내놓고 보자. 뒤엎어놓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제하지 못하는 성품 이것은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요사이 내가 가만히 신앙상담을 해 보면 옛날과 달라서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뭐라고 말하냐면 뒤엎어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까짓 내 못 먹는 밥 남에게 재 뿌려버리고 뒤엎어 버리겠다. 뒤엎어 버리면 남도 고통을 당하거니와 자기에게는 고통이 안 오느냐하면 자기에게도 치명적인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말세에 생기기 때문에 극단주의로 생각하지 말고 말하지 말고 절제함을 가지고서 오래 참으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국적으로 평화를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세에는 사람들이 사나와진다고 했는데 사나운 사람 신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나운 개나 사나운 짐승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풀어놓으면 언제 달려들어서 물지 모를 일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사나와지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 믿기도 곤란한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하도 사나와져서 학교에서 옛날에는 데모를 하더라도 그냥 고함만 치고 구호만 외치더니 요사이는 각목을 가지고 때리지 않나 기름병을 던지지 않나 솜방이에 불을 붙여서 던지지 않나 차를 태우고 점포를 태웁니다. 이러한 사나운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 것입니까? 이런 사나운 행동을 하면서 이것을 가지고서 자유니 민족해방이니 하는데 그런 무서운 사람들이 무슨 자유와 무슨 민족해방을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사나운 사람 사나운 그러한 인물들과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뢰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힘을 잡거나 권력을 잡았을 때 흉악해지고 부패해질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성격이 사나운 것을 없애야 될 것입니다. 나는 많은 가정이 파탄되는 것을 볼 때 사나운 남편이 가정을 파탄하는 것 보았습니다. 사나운 아내 때문에 남편이 짐을 싸서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격을 이 사나운데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또 성경에 말세에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선한 것을 좋아하는지 악한 것을 좋아하는지는 신문지상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선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눈이 가지 않고 남이 잘못되었다 망했다 악한 일이 생겼다는 것은 빨리 신문지상에서 그것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잘못되었다면 귀가 커져서 듣고 남이 잘되었다면 귀가 작아져서 듣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성품이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점점 세상은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알아야 선한 것을 자꾸 칭찬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뭐 결혼해서 10년 20년 같이 사는데 그저 그대로 사는 것이지' 아닙니다. 끝임 없이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환경은 부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의 선한 점을 자꾸 알아내어서 그걸 자꾸 북돋우어주어야 합니다. 잘하는 것 훌륭한 점을 자꾸 북돋아주고 더 잘할 수 있도록 칭찬해 주고 선한 것을 격려해 주고 나쁜 것을 헐뜯지 말아야 그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도 남편의 결점을 자꾸 잡아 당겨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멸시하고 남편의 이미지를 파괴하지 말고 남편의 장점을 자꾸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선한 점을 지적해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면 남편은 마음속에 위로와 용기를 얻고 이 세상에서 우리 아내가 제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 눈이 가자미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가자미눈이 되냐? 자기 아내가 자기 마음에 불만족스러우니까 자꾸 다른 여자 쳐다보느라고 눈이 가자미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바로 뜨게 하려면 남편들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십시오. 용기를 주십시오. 헐뜯지 마십시오. 선한 것을 좋아해서 선을 자꾸 찾아서 격려해 주시면 여러분 어떠한 남편도 어떠한 아내도 가정에서 생명의 원천을 얻고 용기와 희망을 얻고 자기 가정을 사랑하게 되고 사회에 나가서 훌륭히 기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서로 못난 것을 가지고 서로 결점을 가지고 물고 헐뜯고 찢으면 서로 파멸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경은 또 말하기를 말세에 사람들의 성격은 배반하여 판다고 했습니다. 냉철한 이해상관만 남은 이 세상은 배반하여 팝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됩니다. 서로 이해상관으로 말미암아 내게 이익이 되면 안고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언제 보았느냐고 발길로 차고 짓밟아 버리는 이렇게도 냉정한 세계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수한 사랑과 신뢰는 사라져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조금 내게 손해가 가더라도 인정 때문에 서로 붙잡아서 돌보아주는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이러한 생활이 되지 못하고 쉽게 배반하여 팝니다. 언제 천년 만년 같이 살겠다고 목사 앞에서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고 결혼서약을 하고 난 다음에 결혼해 살아보자 말자 조금 이익이 안 된다고 그대로 배반해서 팔아버리고 이혼해 버리고 맙니다. 나는 최근에 한 남자가 외국에서 와서 한국에서 결혼하겠다고 해서 우리 교회 성도 한 분과 결혼하고 어린애까지 낳게 하고 난 다음 자기는 외국에 가서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생활비도 보내지 아니하고 곧장 이혼수속을 해서 보내겠다는 편지만 보낸 흉악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쉽게 배반하여 파는, 냉철한 이해상관만 남은 동물 이러한 동물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고통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도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사람들은 조급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 근면은 사라지고 일거에 만사를 손에 쥐려고 하는 것입니다. 꾸준히 참아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점점 터를 닦아서 훌륭한 일을 성취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일확천금을 하든지 일거에 성공하려고 하는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망할 때가 많고 가정을 파탄에 이르고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우리 사회에 대개 큰 금융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일확천금을 하려고 하는 이와 같은 조급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사람들은 자고합니다. 스스로 잘난 체 해서 남을 무시하고 남을 멸시하고 자기 스스로만 잘난 체 하는 이러한 것 때문에 평안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뒷전에 가고 쾌락을 먼저 사랑합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까지라도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합니다. 오늘 제가 이 설교를 하고 있지만은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 중에도 지금 낚시터에 가 있는 사람 있습니다. 지금 골프장에 가 있는 사람 있는 것입니다. 등산배낭을 매고 지금 산 위에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저 바캉스 간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산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골프장에서 골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예배를 드린다. 나는 낚시하면서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자기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뒷전에 두고 자기 사랑을 추구하고 자기 취미를 먼저 추구합니다. 그 결과 그는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마음에 고통을 드리고 난 다음에 자기의 생활 속에 행복이 다가올 줄 알지만 자기의 취미를 하나님 보다 앞세워 났으니 자기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염려와 근심을 갖다 주고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말하기를 말세에 고통을 가져오는 이유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있어서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뾰족탑을 세워놓고 십자가를 달아놓고 경건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척 하지만 형식과 의식만 남아 있고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없는 신앙생활은 고통의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실제로 성령 없이 설교하는 목사, 성령 없이 교회에 나와서 형식과 의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종교가 하나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하나의 더 보탠 십자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김으로 즐거움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마음속에 넘치게 갖다 주는 신앙생활이란 보혜사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경건의 능력이 되는 성령께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기도드릴 때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고 찬송을 진실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도 꾸밈이 없는 진실하고 참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없이 경건의 능은 부인하는 사람은 경건한 체 해서 거룩, 거룩, 거룩 사람 앞에서는 거룩 한 체를 하나 자기 행동 실제로 보면은 부패하고 파괴적인 생활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신앙 그 자체가 고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수많은 고통이 인간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인간성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변화를 받아야 이 고통에서 해방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전부 다른 사람 때문에 그렇다고 책임 지우지 말고 오늘 이 시간 내 자체가 회개하고 예수님 안에서 변화를 받아야 될 것입니다. 끝임 없는 자기 수련을 통하여 자기와 남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요소를 제거하면 그 결과로 행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라고 성경은 말했습니다. 그 고통이 천재지변으로 다가오는 고통뿐 아니라 인간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고통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혹시 말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내가 고통의 원인자가 아닌가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국민으로서, 세계인으로서, 내가 고통의 원인자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고 성령으로 변화를 받아 자기 수련을 쌓아서 고통의 원인자가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시고 변화 받은 사람되게 도와주시옵시고 믿음 소망 사랑과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져오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