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by 삶의언어 posted Aug 14, 2024 Views 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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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절기
예배드린 날 1986-05-04
오늘의 성구 에베소서 6장 1절로 4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c3dP7o4D9Pg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국가에서는 5월을 청소년의 달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5월 5일은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이는 우리 가정의 기쁨이요 보배요 고민이며 내일의 희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와 어른들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 가고 대화의 단절이 깊어가고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보고 묘사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요사이 어린이들은 어른을 몰라본다, 말을 듣지 않고 조금만 말만해도 대들고 말버릇이 나쁘다, 어린아이들이 참을성이 없다, 물건을 아낄 줄 모르고 전자오락실에만 가려고 하고 놀기만 좋아한다" 그렇게 비난합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발표에 보면 오히려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비난해서 말하기를 80%의 어린이가 어른들이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68%의 어린이가 어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리고 52%의 어린이가 어른들은 이기주의적이라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인가 어른들과 어린이들 사이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떻게 우리들의 2세 국민을 잘 양육해 나가야만 할 것인가? 이것은 어른들에게 부과된 중대한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잘못돼 간다고만 비난하지 말고 저들이 잘못되어 갈 수밖에 없는 환경과 교육을 만들어 낸 어른들 자신이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2세 국민을 양육해야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에게 신앙적인 교양으로 이끌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도 모르고 내세도 알지 못하고 다윈의 진화론만 배워서 인간은 물질에서 시작해서 물질로 마쳐버린다는 이러한 교육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쳐 놓고 난 다음에 그들이 도덕적으로 양심적인 삶을 살라고 아무리 한들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 삶 중에서 절대관심사와 일시적인 관심사를 혼돈 시켜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떠한 동네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낮 좋은 옷을 입고 좋음 음식을 먹고 그는 연락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물질과 권력과 쾌락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현세주의 적이요, 현실주의적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자색과 베옷을 입고 연락하며 즐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대문간에는 거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나사로였었습니다. 나사로는 온 전신에 헌데가 나있었습니다. 개들이 와서 그와 함께 자고 그 헌데를 핥고 그 거지는 그 부잣집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사람이 거지고 병들어있었지만은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과 신앙과 영생에 절대관심사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거지였지만 거지로써 사는 생활조차 괘념치 아니하고 영원의 문제에 관해서 중심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삶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이 부자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굉장한 상여를 만들고 그 초상의 행렬은 굉장했었습니다. 그 부귀와 영화를 그 무덤까지 시비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 부자가 무덤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서 불꽃가운데서 시달리며 고통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천사들이 와서 그를 받들어서 아브라함의품 즉 낙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땅에서 사라져버리고 한줌의 흙으로 변화되고 만다고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지만 여기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저 건너편에 참되고 영원한 삶이 시작하는 것을 밝히 말씀을 해 주시고있는것입니다. 주께서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부자가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그는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의 감각은 다 살아있고 그 기억력도 살아있고 그 마음에 고통도 살아있었습니다. 그가 멀리 바라보니 낙원에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위로 받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소리쳐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셔서 그 손가락으로 찬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시원케 하소서, 내가 이 불꽃가운데서 심히 번뇌하나니..." 그럴 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세상에 있을 때 유물주의자요, 쾌락주의자요, 물질만능주의자요, 현실주의자요, 찬라주의로 살았다. 그러므로 이 영원의 축복과는 관계가 없다. 그뿐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이곳에서 그곳에 건너갈 수도 없고 그곳에서 이곳으로 건너올 수도 없다."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러면 내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부활시켜서, 세상에 보내서 내 형제들을 경고하여 이곳에 오지 말게 하여 주십시오." 그럴 때 아브라함을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세도 있고 선지자도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 가더라도 회개하지 아니할 것이다." 마지막 그들이 간절한 형제를 위한 기도조차 하나님은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살 동안에 하나님을 반역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자랑, 쾌락중심으로만 산 사람은 현실세계가 끝남과 동시에 인생도 종말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후는 견고한 심판이 있을 따름이요, 음부에 내려가서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한들 그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에서 거지로 살아 온몸에 헌데가 나고, 개하고 같이 자고,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었다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삶인 것입니다. 육신의 삶이란 찬라적이고 순간적인 삶이었었습니다. 그 가운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영원을 생각하며, 자기 마음을 다스린 이 거지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삶이 끝나자마자 영원한 삶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예비한 곳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물질적인 세계는 순간적 세계이며, 영적인 삶은 영원한 것이며, 삶의 초점을 영적 삶에 두고 우리 어린이들을 가르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이 삶의 참 연관목적과 가치와 이비가 있는 것을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린이에게 마땅히 갈 길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백발이 되어도 그가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한국의 속담에도 "어릴 적 버릇이,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가정에서 먼저 어린아이를 교육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고 인생의 삶이란, 현실적인 삶이란 영생을 위해서 준비하는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줘야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초점을 현세적이고,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주며 영원에 삶의 초점을 주도록 늘 가르쳐 줘야만되는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늘 들려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듣기 싫어할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깊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애들에게 교육할 때마다 늘 그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도 좋지만 이것은 순간적이고 찬라적인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런 것을 잘 얻으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 세상에는 먼저할것이 있고 나중할것이 있다. 먼저할 것은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잘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제일먼저 할 일이다. 이것만 잘하면 이 세상에서 잘못 살아도 큰후회할것이 없다. 이세상것은 불가불 낡은 옷처럼 벗어서 던져버려야 할 것이니까... 그 위에 영원한 삶은 하나님이 예비한 찬란하고 영광스런 삶이니깐 그것을 너희들이 얻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나는 너희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저는 이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들이 어리석게 볼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장차 세상에 살아갈 동안에 이와 같은 교훈은 거의 뼛속에 아로새겨지기 때문에 반드시 그 교훈이 살아 일어나서 올바른 곳에 삶의 초점을 두고 살게되는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양심적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윤리적, 도덕적인 삶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우리 어린이날뿐만 아니라 우린 우리 가정의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러한 삶의 바탕 속에서 교육을 시켜야만하는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맡은 사명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기업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잘 키워서 우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소유물처럼 자기가 싫으면 자살할 때 어린아이 생명까지 동반으로 자살하는 이러한 범죄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키울 때 도덕적인 인물로 키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방이후, 혼돈을 거쳐서 60년 70년대의 고도 산업화 고도 성장시대를 지나면서 우리 나라의 교육이란 단지, 지식을 주입하고, 기능인들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말았습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인격양성에 등한히 하고 마는 것입니다. 양심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하는 말은 바보들의 말로 전락하고, 오직 수단 방법을 가릴 것 없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을 취하는 길이 성공이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양적으로 많이만 갖다놓으면 성공한다는 것을 가르쳤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을 속이든, 탐관오리를 하든,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출세만 하면 성공하는 것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사회 환경이 가르쳐 주고마는것입니다. 이러고 난 다음에 어린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정직하게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근면하게 살아라, 충성스럽게 살아라'고하면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른들 사회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삶을 늘 바라보고 살아온 어린아이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가정에서 교육할 때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출세보다도 윤리와 도덕적으로 의롭고, 거룩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참인 생을 사는 참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짓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없는 삶이란 모두다 양만 가지고 있지 헛된 구름을 잡는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물질만 가지고 행복했더라면 이 세상에서 돈 많은 사람이 가장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돈 많은 사람이 가장 불행한사람류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교육할 때 하나님의 십계명을 중심으로 교육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계명이란 것은 위험한곳에 설치한 철책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위험한곳에 철책을 해놨다고 이 철책을 왜 해놨냐고 그를 발길로 차고 그를 부러뜨려선 안됩니다. 철책을 넘어가면 벼랑도 있고, 위험한곳이있어 상처를 입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란 인생을 살아가는데 위험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계명의 철책을 쌓아둔것입니다. 계명이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나의 참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설치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 이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하며, 나는 어느 집에 심방 가니깐 그 어린아이들이 자는 침대에 크게 십계명을 써놓은 것을 보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러 들어갈 때 십계명을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깨어나고 난 다음에도 십계명을 보지않을수 없었습니다. '내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이웃을 거짓증거하지말라, 네이웃을 탐하지 말라.' 이것을 저녁에 잘 때도 읽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읽게 해서 그 마음가운데에 십계명이 그들의 윤리와 도덕적 생활의 기반이 되게 만들어 놓은, 이와 같은 가정을 보았었습니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너무 율법적으로 제한을 가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은 여러분, 우리가 해야할일과 하지말아야할일이 있는 것입니다. 가야할곳이있고 가지말아야할곳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랄 때 아버지께서, 어머니께서 yes와 no를 분명히 말해줘야 그 어린아이가 올바른 인격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 십계명을 어린아이들에게 깊이 가르쳐야되는것입니다. 그래야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알게되는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1978년 이후로 일본 일 천만 ??을 위해서 일본에 가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사회에서 내가 특이한 것을 하나 발견했었습니다. 일본사회는 선악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는 개념이 뚜렷이 안 섭니다. 일본은 집단사회라 '집단에 유익이 되는 것은 선이 되고 집단에 훼방이 되는 것은 악이다' 이러한 개념은 뚜렷하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십계명 같은 계명에 있어서 엄격하게, 뚜렷하게 행동을 규제하는 이와같은일이 없는 것을 바라보았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윤리의 구비함이 뚜렷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기 경험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유교의 엄격한 규율이 사라져가고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십계명을 통하여 진실로 행복을 갖다줄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지키는 그 사람이야말로 무엇을 하든지 그 속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를 하면 하나님께서 또한 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랑을 가르쳐야됩니다. 오늘날같이 이기주의적이고, 냉철하며, 자기 이익이라면 남이 죽든 살든 관심을 갖지 아니하는 이러한 사회를 그대로 내버려 둔 다면은 이사회는 자멸되고 말것인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모든 것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사랑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스스로 실천을 해야되는것입니다. 부모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줘야되는것입니다. 풀한 포기도 사랑하고, 꽃하나도 사랑하고, 새도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야 인간은 그 삶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자기 이기주의적으로 자기 주위의 대상과 환경은 이용물로만 생각한 다면은 결국 그 사람은 소외되고 버림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권모술수를 행해서 겉에서는 웃는척하고 뒤에서는 등어리에 칼을 꼽는 일회용 같은 삶이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오는 줄 알고 있지만은 얼마있지아니하면 그는 인격은 소외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버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기피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 가정에 기르는 개조차 다 아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살뿐 아니라 사랑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이와 같은 부모가 되야될것인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기를 때 무엇이나 무조건이나 좋다고만 하지 말고 자기 자식 좋은 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잘하고 못한 것을 분명하게 분별해서 잘한 것은 상을 주고 못한 것은 꾸짖어야하는 것입니다. 남의 자식이라 해서 무조건 잘못했고, 자기 자식은 잘못해도 잘했다고 옹위하는 그 부모는 그 자식의 미래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자고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식에게 갔었습니다. 자식이 마지막 가는 길에 어머니를 사랑해서, 어머니를 만나기를 원하는 줄 알았었습니다. 쇠창살로 그 아들이 손을 내밀면서 엄마, 손좀 밀어달라고... 엄마가 쇠창살로 손을 밀으니깐엄마손을 잡아서 입에 대더니만 엄마 손가락을 깨물어 떨어뜨려버렸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끄집어내고 난 다음 엄마가 말했습니다. "세상에 니가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혀있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틀로 가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압니까? 내가 어릴 때 이웃집에 가서 조그만한 물건 훔쳐올 때 어머니가 그것을 꾸짖어 때렸더라면 내가 손버릇이 나빠지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물건을 훔쳐올때마다 어머니는 오히려 그것을 칭찬해주고 이웃이 내가 물건 훔쳤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변호하고 이웃을 오히려 대적했었습니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어머니가 내게 도벽을 가르쳐주어서 이제는 이와 같이 살인강도가 되어 나는 형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모는 자기 자식이라도 아무리 자기 속에 있는 자식이라도 잘한 것은 잘했다, 못한 것은 못했다 분명한 신상필벌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도덕적인 인물로 키워놔야지 아무리 머리가 좋고 기능이 좋아도 도덕이 사라지면 기능 좋고, 재주 있는 짐승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윤리와 도덕이 무너졌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윤리와 도덕이 없는 그 손에 원자탄과 수소탄과 무서운 살상무기를 가지고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언제 자멸하고 폭발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소련에 체르비엘시에 원자로가 폭발해서 온 세계에 원자재가 휘몰아치는데도 그것을 감추어놓고 난 다음에 발표를 안 합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수만 명이 수십만 명이 원자재에 노출되어서 십년이내에 암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을 당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론적인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아니하는 소련과 같은 이 불한당을 만들어내고 만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없는 삶이란 삶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길러낼때 우리 어린아이들을 지적 소질을 개발해주는 교육을 해야될것인것입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에 어린아이들의 삶은 시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애이때부터 시작해서 "야 이놈아 공부해라, 너 서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중에 가서 지게 지고 물건사소 하고 돌아다니는 놈이 된다, 이놈아." 밤낮 그것입니다. 벌써 정신들만하면 이놈아 공부해라, 이놈아 공부해라, 이놈아 공부해라. 공부에 몸서리증이 납니다 정말 실제. 사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었습니다. 또 부모들이 그렇게 안할수도 없는 것은 경쟁에 뒤지기 때문에 무언가 이 사회가 대단히 잘못되었었습니다. 이러므로 어린아이들은 지치고, 피곤하고 마음속에 반발함이. 부모의 욕심이 어린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만들고 있잖아요. 학교 갔다 공부하고 오면은 집에서 책보따리를 놓기 바쁘게 "이놈아 피아노 치러 가거라, 미술학교에 가거라" 그래서 피아노 치고 무슨 미술학원에 갔다오면은 그 길로 또 "주산학교 가거라" 주산을 하고 오면 그 다음엔 또 "태권도 가거라" 그래서 학교로부터 시작해서 집에 나가서 놀 일이 없습니다. 부모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돌아다니면서 저녁에 와서는 또 숙제한다고 엎드려있습니다. 세상에 어린아이보다도 오늘날 더 피곤하고 지친 애들이 없습니다. 부모의 욕심이 어린 생명을 시들어버리게 하고 아주 몸서리치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면 "엣다, 이제 데모나 한번 해보자, 여태까지 부모의 스케줄에 억압되고 고통을 당했으니 이제는 자유다, 뛰어라, 달려라, 부숴라, 화염병을 던져보라" 실제로 반항아들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오늘 대학의 학생들의 데모가 진실로 사상적인 데모를 하는 사람은 주동적으로 얼마밖에 없고, 그 동안에 사회가 억압해주고 부모가 억압한 그 속에서 사회와 부모에 대한 무언의 반발로 일어나서 지금 데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부모나 사회가 잘못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자녀들 교육에도 부모는 자녀의 천부의 소질을 개발해야되는 것입니다. 조용기같은 사람은 노래를 못 불러요. 내가 최근에 들어 여러 곳에 갔는데 "아이고, 조목사님 노래를 들었는데 형편없더군요."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 아무리 부모가 쥐어박아 노래하라고 해도 나는 노래를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소질이, 설교하는 것이 소질입니다. 설교를 자꾸 가르치라고 하면 그건 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소질을 주었는데 무궁화는 무궁화가 되어야되고, 글로디오라스는 글로디오라스가 되어야되고, 장미꽃은 장미꽃이 되어야하는데 왜 자기의 태어난 소질을 개발해주지않고 다른 것이 되라는 것입니까? 나는 그것을 알고 우리 애들에게 절대로 내 욕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주신대로 하라.' 첫놈도 "음악가 되겠습니다." 안되었지만은 "해라." 둘째 놈도 "음악가 되겠습니다.""너도 음악가 해라 그럼." 셋째는 "전자공학자가 되겠습니다." "좋다, 그것도 해라." 그리곤 속으로는 "아버지, 그렇게 가다가 할 수만 있거들랑 한 놈쯤 목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소질에 따라 밀어줘야지 그걸 부모가 강제로 밀어서 자기의 소질을 꺾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자기의 직업과 자기의 취미가 일치하는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넷째로 여러분, 우리 어린아이를 기를 때 인내와 책임을 걸머지고 사는 어린아이들로 만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는 인스턴트시대에 오늘날 우리는 살고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인스턴트요, 그저 음식도 인스턴트요, 음료도 인스턴트요 모든 것이 인스턴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모두다 무엇이든지 금방 인스턴트로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애들 숙제하는 것 보세요 여러분. 우리시대는 숙제할 때 이마에 땀을 흘리고 낑낑거리며 숙제를 푸는데 요사이에는 숙제보다도 참고서를 먼저 적습니다. 숙제보다 답부터 먼저 적어놓고 숙제한다고. 일기장 적는거 보면 참 희한합니다. 일기장 앞에 몇 개 적어놓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 일기장에는 위와 같음, 어제와 같음. 계속 어제와 같음입니다. 아예 무엇이든지 인스턴트로 해치워버려야지 그 복잡하게 하기 싫어합니다. 음식도 그저 나가면, 배고프면 피자 전화만 걸면 가져오고, 햄버거를 먹어서 전부다 피자, 햄버거 살이 붙어 가지고선 이렇게 뚱뚱해지고 이렇게 해서 어린아이들이 넓이가 없고 깊이가 없는 삶을 살게 되고마는것입니다. 이래서 인내가 없으니깐 조그만 일에 문제만 생기면 그만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고, 반항하고, 혹은 부모를 대적해서 자살도 하고 이런 일들이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좀 인내를 가르쳐야되는 것입니다. 고생도 좀 시켜보고, 자기 스스로 할 일은 자기 스스로 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너무 과보호해서 잠자리도 부모가 다 정리해주고, 채도 부모가 다 정리해주고, 옷도 부모가 입혀주고, 그리고 학교 시간표도 부모가 짜주고, 학용품도 부모가 선택해주고, 학교 친구사귀는것도 부모가 다 선택해서 사귀게 해주고.. 애들은 로봇같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하면 되요 부모 따라서.. 자립심과 독립심과 스스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완전히 빼앗고 맙니다. "너는 모른다, 부모가 다 해준다." 그렇게 과잉보호해서 나중에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의존주의적인 인간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기 때문에 오늘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너무 잘 키우려고 해서 인내와 책임을 가르치지 않는 어린아이들로 만들어서 그 어린아이들의 장래를 망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싶은 말씀은 사랑과 관심을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어린이로서의 자기의 인격과,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그 동심의 세계 속에 부모도 같이 동참을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그저 부모의 부속물로써 그저 부모하는대로 따라만가는, 부모 스케줄대로 맞춰만가는 어린아이들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세계가 있어요. 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50이 넘은 이 마음속에 느껴짐이 하나 있습니다. 한번 내 아버님께 쇼크를 먹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야구시합을 갔습니다. 우리학교하고 다른 학교하고 야구시합이 붙어서 뭐 "이겨라, 이겨라"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고 굉장하게 내딴에는 지구가 무너지는것같은 그런 관심을 가지고 야구시합을 해서 이겼습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모 정신이 없어요. 그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몇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야구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버지, 오늘 우리 동네 중학교하고 야구를 해서 어떻게 이겼는데.." "야, 어른들이 말하는데 잠잠해, 시끄럽다." 내가 지금 50이 넘었는데 그때 중학교 1학년때 먹은 충격이 지금도 속에 있어요. 그때 마음에 슬픔과 괴로움이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 어른들만 되면 저렇게 되느냐, 그래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 나는 그래서 나 혼자 구석에 가서 아주 일부러 꿍시렁 꿍시렁 거렸습니다. '애들은 사람도 아닌가, 어른만 사람인가, 애들이 관심은 없는가..' 내딴에는 그 야구시합이 천지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 어른들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번 들어줬으면 내가 신바람이 나서 일생을 신바람이 난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인데 일생에 마음에 못이 박혔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님이 내게 교육을 참 잘했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참 감사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충격은 그때 그 야구시합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있어라" 하는 그것이 충격을 먹은 것이 지금도 기억에 사라지지 않아요.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있습니다. 그 자기의 세계를 어른들이 짓밟아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관심을 기울여주십시오. 그 어린아이들은 얼마있지않아 자라서 어른이 되어 여러분의 품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두고두고 부모에 대한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깊이 남는 것은 부모가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준 그것은 일생을 두고 남고, 그 마음을 부유하고 풍성하게 하고, 부모와의 언제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어주는것입니다. 오늘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우리마음을 다해서 다시 한번 올바른 부모로써 우리가 자녀들을 기르고있는가.. 한번 살펴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손에 맡긴 미래를 위한 작품입니다. 어른들이 보는 관심과, 애정과, 노력과, 이해를 통하여 원만한 인격자로서 어린아이들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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