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1989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by 삶의언어 posted Oct 04, 2024 Views 1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Extra Form
오늘의 주제 축복
예배드린 날 1989-06-11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sOQBfal0OWM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이 제목으로 여러분과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한주간동안 일본에서 복음을 증거하고왔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다음 신간선을 타고서 나고야에가서 이틀동안 성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일본에가서 요번에도 저의 가슴깊이 느끼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너무나 잘산다는 것입니다. 신간선을 타고 시골을 지나가보면 일본은 도시나 농촌 할것없이 평등하게 너무나 잘삽니다. 일본사회에는 이제 가난이란 일본 옛날에 있던 말로서 일본의 사전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끊임없이 한국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가난한 동포들을 생각하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왜 가난한가? 가난한 것은 과연 좋은것인가?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와같은 질문들이 저의 머리를 어지럽게 해주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확실히 살펴보고 가난문제에 대한 위리의 분명한 태도를 결착짖고자 한 것입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가난했다는데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신앙생활하기위해서는 가난해야 된다고 말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이것을 강조해서 말을하면서 신앙이 돈독하고 신령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가난해야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 모범으로 예수님을 들어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사는동안에 적빈하게 가난한삶을 살았다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예수님이 그렇게 적빈하게 가난한삶을 이세상에서 살았는가? 우리는 재차 한번 성경을 가지고 조명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바로 하나  이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세상에 온것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간나하게 된 것은 말로 향용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에 내려온 그 자체가 얼마나 가난하게 됬는지 그것은 인간으로서 헤아릴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이땅에 사실동안에 정말 예수님은 인간적인 척도에서 보게될 때 그렇게 적빈하게 살으셨느냐? 이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다시한번 성경을 가지고 조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살라고 자꾸 강조를 하시 때문에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활자체를 한번 더 살펴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저는 성경을 살펴보니깐 예수님은 이세상에 살동안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빈하게 살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셍들을 모시는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육신의 모친과 동생을 함께 데리고 사는 집이 갈릴리에 있은 사실이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로 3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또 이틑날 요한이 자기 제자중두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이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쫓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쫓는 것을 보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계시오나이까?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인사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갔었습니다. 예수님께 묻기를 주여 거처가 어딨습니까?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보라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집에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그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집이라도 적빈하고 가난한 집이면 두사람이라는 손님을 하루저녁에 같이 그집에 묶힐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님도 계시고 동생들도 있었는데 그외에 손님 두사람을 집에 재울만한 여유있는 방이 있었기에 손님 두사람을 그날 저녁에 집에서 재우고 먹였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게될 때 예수님은 갈릴리에 당신이 거하시는 집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기를 여우도 굴이있고 산새도 들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그만침 집을 떠나서 처처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셨다 그말씀인 것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거할 집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침 집을 떠나서 정처없이 주님은 하나님 사업에 분망하셨다는 그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여행하실 때 열두제자를 거느리고 다니셨는데 돈궤를 같이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열두제자가 다 젊은 청년들입니다. 열두명을 데리고 다녔으니 열두명이 얼마나 한참 먹을 때 젊은 청년인데 그냥 한께에 왁삭 왁삭 먹어도 보통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두제자가 굶어다녔다는 말이 없습니다. 열두제자 하루 세때를 먹이고 그들에게 옷을 다입혔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보면 예수님은 돈궤를 가지고 댕겼는데 돈궤속에 돈이 꿰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롯유다가 그돈궤에서 훔쳐서 자기 포켓트에 넣기까지 했다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빈손들고 철푼없이 문전걸식하고 다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알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9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신후 혹은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이 돈궤를 가롯유다에게 맡겨놓으시고 제자들에게 쓸 물건을 그 돈궤에서 정정당당하게 돈주고 사셨지 구걸하지 않았셨습니다. 그럴뿐 아니라 주님은 그 돈궤를 가지고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오히려 구제를 해주시면서 다녔었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서 문전걸식을 하고 다녔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 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비굴하게 인생을 사시면서 비굴한 여행을 하고 전도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당당하게 주님께서는 돈을 가지고 살 것을 샀습니다. 도와줄 것 도와줘 가면서 공생애를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럴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을 물질로서 공개한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귀신에 놓여남받고 병고친 사람들이 다니면서 예수님에게 물질을 많이 바쳤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로 3절에 보면 "이후에 예수께서 각성과 촌에 두루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두제자가 함께하여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여자들 곧 일곱귀신이 나간 막달라 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안내 요한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요사이도 그렇지만 여자들이 하나님께 은혜받으면 있는 물질 다가지고서 주의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보니 더구나 헤롯왕의 청지기라니까 헤롯왕의 제산을 다 맡아있는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한나 조차도 예수님께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필요를 물질로서 다 채워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께서 헐벗을 시간이 없어요 굶주릴 시간이 없어요 예수님의 여제자들이 다니면서 얼마나 소상하게 예수님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던지 예수님께서 그렇게 헐벗고 굶주리고 걸식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었습니다. 그다음또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정말 고가의 좋은 옷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아주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다닌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그겉옷과 속옷이 누더기가 되어서 냄새가 나고 이가 득실득실 했으면 군인들이 그것을 막대기에 찍어서 밖에갔다 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형순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벗은 옷을 서로 가져갈려고 야단법석 이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고가의 옷이었습니다. 성경은 보면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3절로 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개씩 나누어 각각 한 개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속옷은 홑이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찟지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옷을 나누고 내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겉옷도 천이 좋았기 때문에 군병들이 서로 가지려고 함으로 우리 똑같이 나누자 그래서 네깃으로 쪼개어서 나누어 가졌었습니다. 걸레를 나누어 가진 것 보았습니까? 옷이 좋았기 때문에 그천을 서로 가질려고 했었습니다. 속옷은 더구나 통으로 짠옷이라 한 것은 그당시에 굉장한 고급적인 옷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은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통으로 짰습니다. 아마 사랑하는 여제자가 정성을 귀울여서 짜준 옷일것입니다. 이 고급이고 좋은옷이기 때문에 이군병들이 이것 누가차지할까 서로 경쟁하다가 우리 제비뽑자 그래서 제비를 뽑아가지고 가져갈정도로 옷이 좋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그냥 냄새가 쿨쿨나고 누더기가 되고 때가 줄줄흐르고 이가 득실득실하는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고 생각하면 굉장한 오해인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그렇게 구차하고 천물이든 삶을 살진 않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만히 예수그리스도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조차 지키지 못하고 비굴한 정도로 가난하고 초췌한 삶을 살지아니하셨던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적어도 중류이상정도의 삶을 사시면서 복음을 증거하셨다는 우리가 정직하게 성경을 볼 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조차 유지할수 없는 가난한 생활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산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적어도 사람들에게 존경받을만한 중류이상의 삶을 살고 계셨으므로 우리도 그정도의 삶은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우리가 고치지 아니하면 안될것입니다.

둘째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될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가난이 어느곳에 있습니까? 하늘에 저 해와달과 그 저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오. 하늘나라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천체는 절대로 하나님이 가난하다고 말하고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면서 이지상에 부유함을 보십시다. 그 말할수없이 많은 종류의 꽃들과 풀 그 말할 수 없는 실과나무들 그리고 곤충들 짐승들 새들 물고기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지으신 만물중에 하나도 가난한 것이 없습니다. 온천지는 태양이 찬란히 비치고 하늘은 높고 푸르고 지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여기에 갖가지 열매맺는 풀과 나무가 나고 있습니다. 새들은 나르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농산물은 잘되고 가지가지 동식물이 있고 인간이 있는 이세계가 어찌 하나님이 가난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풍요롭게 만들은 것을 보게될 때 만드신 만물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이 분명히 보여 알게된다고 성경이 말했으므로 하나님은 가난한 하나님이 아니라 풍요로운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서 하나님을 믿을 때 그와같은 믿음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의 낙원을 지었섰습니다.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었습니다. 에덴에는 먹을것과 있을곳이 충분했었습니다. 얼마나 좋았기에 그곳을 이름지어 낙원이라 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권좌를 찬탈할려고 하다가 반역자로서 쫓겨났다느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이 지구는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그래서 비로서 인간생활에 가난이란 것이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난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마귀와 손을잡고 하나님을 반역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서 오늘날 가난하게 된것입니다. 가난은 축복이 아니라 형별인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를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그 가시덤풀과 엉겅퀴를 낼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래서 이 성경말씀을 보면 가난과 죽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형벌이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린 분명히 알수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인간은 숙명적으로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의 형벌에서 면함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과 죽음에서 조차도 면함을 받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어떠한 하나님이신 것을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잘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우리 믿음의 조상이란 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본따서 살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조차도 부끄러움없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볼 때 그들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실수도 많고 죄도많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할려는 그 투철한 마음은 절절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조상들을 철저히 가난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난은 형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형벌을 받아 가난하게 되었지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복내리실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환경적인 축복도 많이 주셨습니다. 그들은 물론 고난은 많이 겪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고 하나님께 순종함을 배우기 때문에 고난의 삶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하나님께서 면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3장 1절로 2절에 이렇게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여기에 가난했단 말은 없습니다. 육축도 풍부하고 은금즉 돈도 풍부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적빈한 삶을 살지 않았었습니다. 창세기 24장 35절로 36절에보면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며느리를 얻기 위해서 보내셨을 때 그가 며느리가 될 수 있는 그 집안에 가서 그 주인에 대한 보고를 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야훼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주어 창성케 하시매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여기에 종조차 다른사람에게 말하기를 그의 주인 아브라함은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풍부하게 주셨다고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많은 고난을 받고 깨어져서 순종함과 믿음은 배웠지만은 아브라함은 물질적으로 가난에서 궁핍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창세기 26장 12절로 14절에 보면 이삭이 그땅에서 농사하여 그해 백배나 얻었고 야훼께서 복을 주심으로 그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야훼가 복을주면 그 물질적인 생활에 창대함을 얻는다고 말한고 있는것입니다. 야훼께서 저주하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살고 가는곳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난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요 형벌이지 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야곱은 어떻게 했을까요? 야곱은 창세기 32장 10절에 보면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은총과 모든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수 없사오나 내가 내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은 하나님앞에서 기도할 때 고백했습니다. 나는 지팡이 하나만 집고 요단을 건너 외아저씨 집으로 이십년전에 도망을 쳤는데 이십년후에 고향으로 돌아올때는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수의 한떼 두떼 짐승을 거느린 동방에서 제일가는 거부가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나이다고 고백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면 물질적인 생활 환경도 창성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땟국물이 꿰재재하게 되어서 주여 하고 있으면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현실생활까지 창성케하고 하나님의 심판을받고 형벌을받으면 현실생활조차도 가난하고 저주로 꽉들어차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나가서 430년동안 종살이 했지만은 애굽사람이 얼마나 두려워할정도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받아 창대하게 되었다고 말한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낼때 너는 저 가난이 줄줄 흐르는 저주받은 가나안 땅으로 가자 그렇게말 안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가자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한 것은 젖과꿀이 흐르는 땅이지 가난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사실을 보게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실때는 환경적으로 물질적인 축복도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형벌하실때는 가난과 죽음이 같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넷째로 우리는 가난을 이기는 삶을 살기위해서 어떻게 해야될까요?
말할필요없이 그나라와 그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네게 더하시리라 했는데 우리 예수믿는 사람이야 하늘나라를 구하고 하늘나라의인 예수그리스도를 구할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와 하늘의를 구하면서 여러분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전통적으로 가시와 엉겅퀴로 꽉들어차서 패배의식 가난의식으로 마음이 꽉들어차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부정적인 마음을 통하여 절대로 복을 내릴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가난의식이나 패배의식에서 놓여남을 받고 이 마음이 하나님의 축복속에 있어야 됩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청소하고 마음이 긍정적으로 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9절에 기록한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저희 가난하심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그 말로다할수 없는 부요를 버리시고 인간생활로 내려온 것은 인간세계속에서 저주를 받아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를 부요케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만드실뿐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을 부요케 만들기위해서 주님은 이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이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부요의식으로 꽉 들어채워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는 늘 못산다 나는 늘 가난하다는 생각으로 채워논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목적을 파괴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가난하심으로 인하여 부요케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저주를 예수께서 담당하고 청산해 버렸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었을뿐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또한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 있는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하고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하라 하셨음이니 예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를 받았으므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인 여러분과 나에게 미치게 하려함이라"고 말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창대한 물질적인 복을 주신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아브라함의 복이 이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미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가난의식이나 저주의식을 완전히 오늘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다 내어쫓아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일조의 언약을 굳세게 부여잡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말라기 3장 8절로 12절에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붓지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 이와같이 하나님께 십일조의 언약을 우리가 반드시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복을 반드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물질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잠언서 3장 9절로 10절에도 "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익은 열매로 야훼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접들의 새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십일조와 물질로서 공개하고 공경하기를 등한히 하지 말아야 될것이며 우리의 생활속에서 현실적으로 필요할때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을 늘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11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둘것이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는 것은 정당한 이치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했고 또 성경에는 신명기 28장 1절로 6절에 "네가 네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세계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것이라 내가 네 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받고 들에서도 복을받을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받을것이며 네 광주라와 떡 반죽그릇이 복을받을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고난없는 삶을 구할순 없습니다만 하나님앞에서 복을받아 가난에서 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가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형벌이요 저주이지 결코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 여러분은 가난의식과 저주의식을 마음속에서 다 추방해버리고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받아 여러분 영혼이 잘됨같에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하나님게 드리고 이웃에 구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아버지 많은 우리 성도들이 가난이 숙명인줄알고 또 가난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알고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켜주는 것은 가난은 하나님의 형벌이요 하나님의 저주에 속하지 하나님의 복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인즉 우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함께 복을받아야만 마땅할 것이옵나이다. 이러므로 우리 생각이 달라지게 도와주시옵시고 우리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가 달라지게 도와주시옵시고 우리 아버지께 십일조를 드리고 물질로 공경하며 심고 거두는 법칙을 사용하며 우린 하나님앞에 단호하게 나가서 가난을 물리쳐 주시길 기도하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여서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되어서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구제하며 전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간구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41004-07.jpg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