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하든 원하지 않던 자기의 마음 속에 깊은 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마음의 병은 그 성장과정과 환경에 따라서 더 악화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바탕에 잠복하고 있어서 사태가 여의치 못하면 폭발하게 됩니다. 이 병의 이름은 바로 시기와 질투, 분노 등의 모체인 미움이고, 불안과 초조의 근본인 공포이며, 열등의식이나 무기력의 열매인 좌절감이고, 자신을 무자격자로 낙인찍는 죄책감이며,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교만 및 자신의 분수를 뛰어넘어 욕심을 가지는 탐욕입니다. 이 마음의 병이 복합적인 형태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여 개인의 인격을 삐뚤어지게 하고 가정을 불행하게 하며 파괴하고 대인 관계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 마음의 병을 교육이나 사회적인 윤리나 도덕, 법률을 통해 억압해 놓을 수는 있어도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힘으로 이 병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놀랍게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치료하는 전적이고 근본적인 힘이 됩니다.
그러면 왜 사랑이 이와 같이 위대할까요? 도대체 사랑은 무엇일까요? 오늘 그 문제에 관해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랑의 위대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은 웅변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하고 입에서 꿀이 떨어지듯 말을 잘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설복시키고 매혹한다 하더라도 실제 그 속에 사랑이 충만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내용이 없는 텅 빈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중 선동적인 웅변에는 대중을 조작하여 환심을 사려는 사기 적인 의도가 숨어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은 웅변보다 위대합니다. 사랑이 없는 달변이나 웅변은 그 배후에 거짓이 숨어있을 따름입니다. 사랑은 지식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이 20세기 말에 사는 우리들보다 지식과 정보가 태산 같이 많았던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이 행복해 하나요? 지식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생활에 행복과 축복이 넘쳐나나요?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진 세계 속에 얼음장같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과학, 산업은 발전시켰지만 이 발전된 환경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며 살상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발달된 지식으로부터 기인된 전쟁을 통해 대량학살을 당했습니까? 또, 그로 인해 이 세계가 불바다가 될 위험 속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지식은 무의미하게 되고 맙니다. 사랑은 지식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학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자기가 남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이 안다고 교만한 생각을 품을 뿐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식보다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은 위대한 업적보다 낫습니다. 누군가가 일어나 큰 사업을 일으켜서 공장을 세워 수많은 제품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의 죽은 기념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고 큰 건물을 짓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 없이는 진실한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도와주고 살릴 수 없는 업적이라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위대한 업적보다 낫습니다.
사랑은 구제와 희생보다 낫습니다. 사랑 없는 구제는 사람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는 부자가 그 돈으로 사람들은 도와준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 없이 으스대며 사람들을 도와주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곤란 때문에 도움은 받지만 그 도움을 받고 난 후 마음은 더 비굴해 지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짓눌리게 되어 적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히려 안 도와준 것 보다 더 못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랑 없는 구제나 희생이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구제나 희생보다 낫습니다.
인간은 밥만 먹고살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을 받고 주며 사랑 가운데 살 때 비로소 마음 속에 기쁨도 있고 희망도 차서 소신 있고 활달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지면 시들어지는 꽃처럼 사람들은 마음 속에 삶의 용기와 의욕과 활달한 기상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랑은 웅변보다 나으며 지식보다 나으며 위대한 업적보다, 구제와 희생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랑 없이 이러한 일을 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적은 일을 하더라도 많은 사랑을 가지고 일을 하면 이것이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하여 한 없이 부패되었지만 사랑의 형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을 지라도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람들은 사람의 원천 되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은 바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속에 사랑이 있으면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어떠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까?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급한 판단은 이해를 망쳐버립니다. 어떤 일이 생길 때 조급하게 상대를 판단하여 비평해 버리면 이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가정에 부부가 살면서 어떠한 사건이 생기면 부인이 즉각 남편을 원망한다든지 남편이 부인을 비평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사랑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으며 사태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이해를 하려면 온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분노가 가득한 마음은 삐뚤어지게 이해하려 합니다. 분이 가득한 상태에서 성을 내고 문제를 결정하고 나면 시간이 흐른 후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흥분과 분노는 잘 못된 결정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탄식한 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온유함으로 이해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시기해서 잘못되기를 원하면서 어떻게 공정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진실로 투기심을 버리고 이해하려 애를 쓸 때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합니까? 비록 자식이 여러 가지 면에서 부실하고 잘못이 많아도 부모는 자식을 깊은 인내로서 바라보고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훈계하고 자식이 잘되는 것을 투기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공정하게 바라보고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마음은 이해하랴 노력하는 마음입니다.
한 가정에서 부부간에 서로 이해하려 노력할 때, 한 사회 단체에서도 서로 이해하려 노력할 때 비로소 사랑은 작동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해를 저버릴 때 사랑은 식어집니다.
또 사랑은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는 타인을 동정하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만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자랑치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상대에게 열등 의식과 시기심을 갖게 합니다. 내가 잘 났다고 내 성취와 학력을 자랑하면 그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이를 들을 때 마음 속에 시기가 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내세워 자랑한 후 어떻게 상대를 동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상대를 동정하려할 때는 자신을 나타내선 안됩니다.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서 때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뭐를 달라 하지도 않는데 왜 나를 미워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집단 생활 속에서 자기 스스로가 남보다 잘났다고 우월감과 교만함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냄새나고 더러운 것은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우월하고 열등한 것 없이 다 동등합니다. 모두를 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사랑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은연중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배척 당하는 것입니다.
또, 동정하기 위해서는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합니다. 무례한 행동은 타인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무례하게 남의 집에 신발도 벗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집사람들은 무시하는 행동이겠습니까? 왜 무례한 행동을 합니까? 이는 상대를 무시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진실로 타인을 동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을 동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의 의구심과 적대감을 유발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상대를 이용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 온갖 권모술수를 쓸 때 그것을 사람들은 대번에 깨닫게 되고 의심과 적대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냄은 상대를 위협합니다. 상대를 위협하고 협박한 후 동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자기 주장 보다 타를 존중하는 것이데 동정하기 위해서는 자랑치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남을 진실로 동정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선과 정의의 편에 서서 삽니다. 악과 불의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인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 이웃이 악한 짓을 하는데 그것을 덮어주고 보호해 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 상대에게 독을 먹여 죽이는 것입니다. 악은 결국엔 드러나서 인간을 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이 나면 그것을 덮어두고 치료하지 않는 것과 악을 덮어두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인륜과 도덕을 짓밟는 이러한 악을 행할 때 우리는 그 악을 사랑해서는 안되고 대적해야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정의의 도를 짓밟아 버리고 불의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불의를 동정하고 보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정의의 도를 짓밟을 때 단호히 배척하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참을 기뻐하고 거짓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의미에서 남을 도와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여줘야 사랑입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입혀줘야 사랑입니다. 거처가 없는 자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어야 사랑입니다. 야고보서는 한 사람이 배고프고 헐벗어 왔는데 '배부르게 먹어라 따뜻하게 옷 입어라'하면서 필요한 것을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많은 돈을 들여 엘림 복지 타운을 세웁니까? 이것은 우리 교회가 한국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이어서가 아니라 한국과 세계에서 최대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 해서 그 사랑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기술을 배우지 못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불러 기술 교육을 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직장을 알선해 주어 아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올 데 갈데 없어 방황하는 노인들을 모셔 편하게 여생을 보내시다 천국가게 해 드리는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은 실제적으로 남의 짐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긍정적이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 부정적인 태도를 갖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자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갖나요? 천 번 만 번 넘어져도 일으켜서 오래 참으며 자식이 잘 될 것을 믿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바라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 자식에 대해서 만이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나 형제나 혹은 이웃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끈질기게 참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끝까지 믿습니다. 올바르게 될 것을 끝까지 바라고 견디어 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요소를 갖지 않고 입술만 가지고 사랑을 말해보았자 누가 그 사랑을 믿겠습니까? 사랑은 이해하려 노력하고 나보다 남을 더 동정하는 것이며 선과 정의 편에 단호히 서서 나가고 실제적으로 남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어주는 것이며 절대 낙심하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봅시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셨는데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무한하게 이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불법을 행하고 죄를 짓는다 해서 일시에 진노하셨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인간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없는 이해심을 가지고 인간을 바라보셨습니다. 인간이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하고 쫓겨났지만 인간의 생명은 함 줌의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죄책과 정죄에 몸부림치는 인간이며 허무와 무의미에 발버둥치는 인간이며 죽음과 무로 돌아가는 비참한 인간임을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멸하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위치에 서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몸소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못나고 버림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불러서 구원하시려 애쓰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신 예수님은 철저히 여러분과 저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심판대신 사랑으로 동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와 그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몸소 육신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그 좁은 태 속에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은 죄를 용서해 주셔서 구원해 주셨고 병든 자는 손수 안수하셔서 고쳐주셨으며 귀신은 쫓아내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배고픈 자를 먹여 주시고 환란에 처한 자에게 평안을 주시고 죽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이 위대한 은총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심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고 동정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 가슴 가득한 동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생활 가운데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는 악과 불의와 거짓을 없애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악과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복음을 전할 때도 바리새 교인이나 사두개 교인이나 교법사들의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악과 불의와 거짓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결하시고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악이나 불의나 거짓은 결국 우리의 내적인 생활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하기 위해서 결국 주님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해서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 없이 태어나시고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죄의 빚을 갚기 위해서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그 고난과 심판이란 사람의 말로선 척도할 수 없는 무서운 고통과 시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괴로웠기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십자가상에서 통곡하셨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청산하셨을 때에는 주님께서는 승리의 외침을 외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그리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간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인간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모두 다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 그대로 초청하셔서 그 보혈로 씻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진실로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고 그리고 우리에 대한 끝없는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우리가 곧장 천사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넘어지고 죄를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또다시 반역하고 회개하고 돌아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인간이 잘 될 것을 믿고 인간이 선하게 될 것을 바라시며 견디시면서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의 손길과 사랑의 손길을 통하여 우리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한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다 함과 같으니라"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천지간에 무엇이 도전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사이를 천지간의 누가 끊을 수 있겠느냐고 담대하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이나 권세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고 현재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나면 그 사랑의 줄은 얼마나 강한지 그 사랑의 줄을 끊을 힘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고 그 아래에도, 금새에도 내세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가 몸 찢고 피 흘린 대가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으로도 측정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찬송가 작가는 말하기를 '온 대양의 물을 다 잉크로 삼고 새의 깃털을 펜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다 적는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해 다 적을 수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도 끊을 수 없는 끈질긴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인간의 마음 바탕에 큰 변화가 일어나며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던 병의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랑에 정복되고 공포는 사랑으로 말미암는 믿음에 정복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은 하나님의 품과 그 큰 사랑 속에서 사라지며 죄책은 보혈로 씻어지고 교만은 깨어지고 탐욕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이 사랑을 내 가슴속에, 가정에 이웃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실천할 수 있는가하는데 인류의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어떠한 것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랑 이외에는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개인, 가정, 생활, 사회, 그리고 국가 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폭포처럼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인간의 이성과 사상으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끝없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대해주시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 가운데 악과 불의와 거짓을 다 제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돈과 지위와 명예와 사람을 의지해서 사랑을 구하나 그러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잠시 후에는 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 이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안기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금세의 안식, 내세의 복락을 얻는 성도들이 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사랑 가운데 살므로 참 마음의 기쁨과 소망과 화평을 갖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