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by 삶의언어 posted May 03, 2024 Views 3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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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중생/회개
예배드린 날 1981-12-20
오늘의 성구 마태복음 6장 12~15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XxezTEsRxv4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용서를 비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한번도 용서를 빌은 기사가 없습니다. 그것 왜 그러냐. 하나님은 절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실수하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또 실수나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용서가 절대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여러분과 나는 지극히 불안전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과 행동과 생활에 끊임없이 실수하고 죄짓고 실패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받지 않고는 우리의 존재가 이 땅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막 배우기 시작해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옮기는데 잘 걷지 못하고 넘어진다고 그냥 부모들이 그냥 때린다면 어린아이는 그만 겁을 집어 먹고서 다시는 걸음마를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걷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비록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자꾸 격려를 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면 그 어린아이는 나중에 걸을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실패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손대는 것마다 척척 그대로 성공한다면 이 세상에 실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실패합니다. 실패 할 때마다 우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이제는 절망이라고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실패한 것은 뒤로 던져 버리고 용서하고 재기해서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복하고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용서받고 용서해 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에 용서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한 예수님의 그 심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알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완전한 인간 아담을 지어서 그곳에 살게 했지만 그가 마귀의 꾀임을 받아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고 범죄하고 난 다음에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되어서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이 에덴에서 찾아 오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내가 벌거벗어 부끄러워 숨었나이다.”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은 우리의 양심이 벌거벗은 것처럼 수치를 당하는 것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 부끄러움에서 면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서 에덴동산에서 죽였습니다.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고 그 짐승의 피를 에덴동산에서 흘리고 그 가죽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게 하는 옷을 입혀서 내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크나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짐승이 피를 흘려 죽고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입혀서 내 보낸 것은 장차 죄지은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보내시사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고 그 피값으로 죄를 다 갚고 예수의 의로운 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줄 것을 주님께서 벌써 에덴에서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여러분과 나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서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정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다 용서해 주었지 주께서 붙잡아서 회개하는 사람을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리세교인, 사두개교인, 율법사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다는 여자 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끌고 와서 발길로 차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이렇게 해나갈 수 없는 질문을 해서 올무에 잡으려고 했습니다. “주여,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기를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말하나이까? 선생은 어찌하겠나이까?” 그럴 때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안하시고 허리를 굽혀서 땅에 글을 썼습니다. 성경에는 무슨 말을 썼다고 안했지만 틀림없이 예수님은 십계명을 다 적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승화같이 외쳤습니다. “선생이여, 선생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하겠나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고개를 들어 그 불타는 눈길로 한 사람 한 사람 하고 얼굴을 마주쳐 보시고 난 다음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을 먼저 들어서 이 여자를 쳐라!” 그런 다음 주님께서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좌우간 무슨 글을 썼든지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글 쓰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한 무리들이 모두다 돌과 몽둥이를 버려두고 도망을 쳤으니 주께서 무슨 글을 썼다고 생각됩니까? 십계명에 비추어 보아서 그들이 지은 죄악을 틀림없이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어깨 너머로 읽은 이 사람들은 이 여자를 돌로 쳤다가는 그 다음 자기들도 모조리 돌에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혼비백산해서 다 달아나 버리고 만 것 입니다. 한참 만에 예수님께서 허리를 들어 일어서서 보니까 모든 돌과 나무만 버려 놓고 다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불렀습니다. “여자여, 너희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소스라쳐 놀라서 이 여자가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두리번 두리번 살펴보니 아무 사람도 없습니다. 여자가 놀라서 예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얼굴은 상기되고 울어서 눈은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옷은 찢어졌으며 머리를 흐트러졌습니다. “주여 아무도 정죄하는 자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보시고 고개를 끄덕이시고 “이 사람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너는 집에 돌아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여자는 황황히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발걸음 따라 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로 말미암아 살았다. 다시는 범죄 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범죄 하지 아니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용서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요일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는 값없이 주는 용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시고 예수님께서 도적질하고 살인한 사람을 용서했는데 주님께서는 그 용서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었습니다. 기어코 주님께서는 모든 이 사람들의 죄와 불의와 추악과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이 사람들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벌거 벗긴 채로 십자가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서 살 찢고 피 흘려서 고난당하므로 이 죄과를 도말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부어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대가를 주께서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그 비극적인 것을 주님께서는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통을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을 대가로써 그 피흘린 대가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벗겨서 오늘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마다 용서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회개만 하고 나오면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과거의 죄에 대해서 논란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주홍 같은 것을 흰 눈같이 흰 눈 같은 것을 양털같이 희게 씻어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를 심판하고 멸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어찌하든지 회개시켜서 용서받게 하려고 오늘 성령으로 이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제 예수를 믿고 용서를 받았으면 계속 그 용서 안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주님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계속 우리는 용서하면서 살고 더 깊은 용서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해서 용서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기도를 늘 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한번 구원의 용서를 받고 난 다음 계속 우리가 깊이 용서받고 하나님께 깊이 사랑받고 은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용서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용서 속에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과 같이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의 용서를 계속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계속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성령의 역사를 받기 위해서는 계속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됩니다. 남편을 계속 용서해야 됩니다. 아내를 계속 용서해야 됩니다. 자녀를 용서하고 부모를 용서하고 내가 이웃이 내게 범죄 할 때 그것을 계속 용서하면서 나가야될 용서의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18:23~35에 보면 예수께서 여기에 대한 놀라운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한 임금이 계셨는데 그 임금이 한 부하에게 일만 달란트의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하가 일만 달란트를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돈을 갚을 날이 왔는데 돈을 갚을 생각도 못하고 갚을 돈도 없으니까 임금이 명령을 해서 그 모든 처자를 다 잡아 종으로 팔고 그의 집과 재산을 다 팔아서 빚을 갚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임금에게 와서 그냥 머리를 조아리고 임금님께 사정을 합니다. “임금님, 내게 말미를 주시옵소서. 시간만 주시면 내가 어찌하든지 이 빚을 갚겠나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주시옵소서.” 간청하고 사정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그를 측은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래서 그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좋다. 나는 다 탕감한다. 이제는 너 안 갚아도 좋다. 그러므로 돌아가라!” 그래서 이 사람이 일 만 달란트 탕감을 받고 난 다음 아주 기분이 좋아서 밖으로 나왔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의 동료 한사람 만났는데 이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 빌려준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잡자마자 멱살을 쥐고서 “야 이 녀석아! 너 내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것 갚으라.” “내가 지금 사정이 여의치 못하고 도저히 생활이 안 되어서 일백 데나리온을 갚을 수 없으니 시간과 말미를..” “이 자식아 시간과 말미가 뭐냐? 이 건방진 놈아, 일백 데나리온 썼으면 네가 갚아야 될 것 아니야. 너 갚을 때까지 내가 가만히 두는가 봐라” 그래서 그 사람의 목을 잡고 끌고가서 감방이 처넣어 버리고 만 것 입니다. 이 사실을 본 친구들이 이렇게 괘씸할 수가 있느냐. 자기는 임금님에게 일 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으면서 불과 얼마 안 되는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이렇게 잡아서 감옥에 처 넣을 수가 있느냐. 그래서 임금에게 가서 그것을 고발했습니다. “임금님이여, 당신이 일 만 달란트 용서해준 그 사람은 자기 친구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것도 용서해 주지 못하고 그를 잡아서 감옥에 가뒀나이다.” 임금이 보좌에 앉아서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해서 일어나서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그 녀석 당장 데려 오너라” 부하들이 가서 끌고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야 이놈아! 너는 내게 일 만달란트 빚을 졌는데 네가 하도 사정을 하고 통곡을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하므로 내가 다 탕감해 주었는데 이런 용서를 내게 받았으면 너도 반드시 가서 너의 동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도 너에게 용서해 달라고 할 때 네가 능히 탕감하고 용서해 줘야 될 것 아니야. 너는 내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으면서 어떻게 동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잡아서 감옥에 넣느냐? 이 악한 놈을 잡아서 옥에 넣어서 일만 달란트 다 갚을 때까지 고통을 주어라.” 이 예를 예수님께서 드시고 난 다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와 같이 자기 이웃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한 사람을 천부께서는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이웃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해 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여러분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이웃하고 대단히 사이가 나빠서 말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용서해 줄 수 없다. 나는 이 녀석 절대로 용서해 줄 수 없다.”목사님이 그분을 찾아가서 “그러지 말고 용서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넓은 마음을 품고 그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십쇼. 그렇게 부탁하니까 난 절대로 할 수 없어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용서 할 수 없다. 그러자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럼 오늘부터 시작해서 당신은 죄지을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래요?” 당신은 오늘부터 죄지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죄지은 자를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해 주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당신이 이제부터 죄를 지으면 누구에게 용서를 받을 것이요. 그러므로 당신은 오늘부터 하나님 같이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이 사람이 아주 소름이 끼쳐 죄 안 짓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줍니다. 그렇게 회개 했다는 말을 제가 책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이외에는 완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죄짓는 것도 없고 실패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용서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자연환경을 보십시오.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산사태가 무너지고 혹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온 들과 산이 불탔다고 할지라도 세월이 흘러가면 자연은 용서합니다. 그것을 꾸짖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자연은 용서해서 그곳에 다시 풀이 나게 하고 그곳에 나무가 나게 하고 이름 모를 꽃이 피게 하고 그래서 그 상처 입은 것을 용서해서 아름답게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자연도 상처 입은 것을 치료하거든 하물며 사람들이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그 상처를 치료할 줄 모른다면 이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께서 만일 내가 남편을 용서해 줄 수 없다. 나는 내 아내를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우리 부모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런 마음에 원한이 있으면 여러분께서 용서해 주지 못하는 것 만큼 여러분은 이제 죄지을 권한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죄짓지 말고 하나님과 같이 영광스럽고 의롭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웃을 용서 안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 한평생 살면서 우리들은 끊임없이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린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죄를 법적으로 주님 다 용서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용서를 체험하고 하나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같이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끔 전도하면 사람들이 이런 말 합니다. “아이고 나는 지금 죄를 많이 지어서 교회 나갈 수가 없어요. 아직 팔팔 젊고 세상에 나가서 사업도 하고 일을 해야 되니 자꾸 짓잖아요. 그러므로 이제 나이가 좀 늙어 가지고서 기력도 다 쇠하고 세상살이에도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 집에 들어앉으면 그때 죄 좀 적게 지을 때 그때 교회 나가겠습니다.” 여러분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 교회 나온다는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는 천당 목욕탕입니다. 목욕탕이라는 것은 때 없는 사람은 목욕탕에 올 필요가 없어요. 때가 없는데 왜 목욕탕에 나와요. 때가 많은 사람이 목욕탕에 나와서 목욕을 하고 때를 씻고 난 다음 몸이 깨끗해지는 것이지.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바로 죄가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자격자를 선정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으므로 인생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보고 교회에 나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는 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 쓸데 있느니라고 해서 병이 들어서 고생하는 사람보고 교회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불러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노라.’ 그래서 죄인을 주님께서 교회에 나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교회는 모조리 짐진 사람 그렇지 않으면 병든 사람 그렇지 않으면 죄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처음에 나오면 복잡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에 나오면 전부 하나님의 백성이고 전부 천사 같아야 될 것인데 왜 교회가 시끄럽고 왜 교회 나온 사람들이 저 모양 저 꼴이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스스로 잘나고 훌륭한 사람은 교회 안 나와요. 그러나 스스로 못난 사람들이 나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그렇지 않으면 죄인들이 교회 나오니까 자기 신세가 괴롭고 고통스러우니까 자기가 괴로운 사람이 신경질을 잘 내요. 자기가 건강하고 좋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래서 처음 교회 나온 사람들 교회에서 천사들만 오는 것처럼 알지만 그렇지 않고 병들고 괴로운 사람들이 와서 그곳에서 주의 말씀을 듣고 치료를 받고 용서를 받고 축복을 받아서 영혼이 잘되게 되고 범사가 형통하게 되고 강건하게 되고 승리자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교회는 주님께서 무궁무진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신학교 나와서 제일 처음 목회를 할 때 참 교회 와서 목회하려니 괴로워요. 왜냐하면 세상에 못난 사람들만 다 교회에 모여 오는데 어찌나 가시노릇을 하는지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 그랬습니다. ‘주님! 그 벼락 두었다가 뭘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그 흔한 벼락 이때 좀 쓰십시오. 그냥 저 사람 좀 안칩니까? 하나님이여 저 사람 좀 쥐어박지 않습니까? 저 사람 좀 변하지 않습니까?’ 목회하면서 그런 기도를 하다 보니까 교회 나오는 몇 사람 치고 벼락 안 맞을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다 시험에 든 사람들이고 모두 다 괴로운 사람들이니까 다 괴로움을 끼치니까 그렇게 기도하다 보니까 교회 나왔다가 모두 다 벼락 맞고 말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교회라는 것은 병들고 괴롭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이 나오기 때문에 또 참고 또 참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끝까지 참아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다 용서를 받고 치료를 받고 변화를 받아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나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 같은 사람도 건져서 천국까지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죄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후려 때렸더라면 여러분과 나는 지금 뼈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짓고 또 돌아오며 또 회개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생각하기에 아무리 용서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용서할까 싶어서 ‘하나님이여, 내 친구가 내게 범죄 하면 큰 마음먹고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보고 ‘이 사람아, 내게 네게 말하노니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범죄하고 회개하고 돌아오거든 용서해 줘라.’ 베드로가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크게 마음먹고 하루 일곱 번 용서하면 좋지 싶었는데 하루에 490번 죄를 짓고 490번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라시니 하루 490번 죄를 지으려면 부지런히 지어야 490번 짓습니다. 보통으로 490번 죄를 못 짓 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은 여러분과 나를 용서해서 어찌하든지 구원하기를 결심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용서하도록 결심했으면 여러분도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자녀를, 이웃을 용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여러분 용서할 때 우리에게 치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최악의 파괴자인 것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정신적인 요소가 미움과 분노라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면 내 마음속에 소화가 안 되고 벌써 잠이 안 오고 심장이 뛰고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의사는 의학협회에서 하는 말이 미움과 분노는 심장마비를 일으킨다고 늘 가르치고 분노하지 말라고 한 다음에 토론시간에 그만 자기 이론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벼락같이 성을 냈다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었다는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우리를 치명적으로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언제나 용서를 빌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려고 할 때 내가 치료를 받습니다. 내가 남의 얼굴에 흙칠하려면 내 손에 흙먼지 칠해야 되는 것처럼 남을 미워하거나 분노하려면 내 스스로 영혼 속에 쓴물이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할 때 먼저 자아가 치료받아서 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간에 싸움하고 밤에 서로 등을 돌이켜서 드러누워 있을 때 밤새도록 달콤한 잠이 옵니까? 잠이 안 옵니다. 밤새도록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용서해 주면 내가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부부간에 싸우고 용서해 주기 참 쉽습니다. 옛날에는 ’나 잘못했어.‘ 이러면 개면적어서 프라이드도 있고 못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꿇어앉아서 들으라고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잘못하였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직접 용서도 안구하고 하나님을 통해서 제3자를 통해서 다 해결하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도방법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용서를 할 때 자아가 치료받고 그 다음에 이웃하고 이렇게 용서하니까 화목이 되고 내가 용서해주고 용서받으면 결과 화목이 되고 이래서 용서가 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로움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깊은 의로움을 주셔서 하나님의 깊은 품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기도가 깊어질 수 있고 믿음이 깊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를 통해서 깊어져서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고 강해지면 그 사람의 믿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마다 얻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자가 희생을 감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용서받는 사람이야 간단하게 받지만 용서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무릎서고 용서해야 되기 때문에 용서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그러나 용서만이 올바른 이해와 동정과 화평을 가져오고 그 결과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용서받은 우리들은 믿을 때부터 이미 남을 용서해야 될 의무를 지고 책임을 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내게 예수님이 용서해준 것처럼 이제 나도 끊임없이 용서의 빚을 짊어지고 매일 매일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용서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죄를 짓고 불의하며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용서해 주신 것처럼 이제 예수믿는 우리들은 용서의 빚을 받았으므로 아버지여 만나는 사람마다 최선을 다해서 용서해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지만 하나님이 나중에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왔아오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예수님과 손을 잡고 용서하고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