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싫지만 꼭 필요한 고난

by 삶의언어 posted Apr 11, 2024 Views 5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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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고난
예배드린 날 2006-11-26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11장 23절로 3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S-i1Jj5TaFM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중략)…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1장 23∼31절

 


육체의 가시로 주님께 부르짖은 바울처럼
약함과 능욕과 핍박중에도 주를 의지하면
고난은 축복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가 돼


 이 세상에 병균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병균이 존재하는한 우리는 이 병균과 싸워 이겨야 건강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고난은 항상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면 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나 고난에 지면 신앙 역시 실패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인구원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을 때는 고난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것이 전혀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죽음조차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처소에 있으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탐욕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큰 재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므로 가져온 것은 삼대재앙으로서 첫째 재앙은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혼과 육을 통해서만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므로 이제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둘째 재앙은 저주를 이 땅에 가져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저주가 오게 되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란 우리의 삶에 수많은 질곡과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고생하고 수고해야 먹고 살게 되었고 크고 작은 괴로움이 인생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셋째 재앙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죽음의 재앙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처음 사람이 지음받았을 때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지만 죄값으로 우리의 육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태어나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이 인생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가장 비극적인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그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 고난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므로 운명적으로 삼대재앙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 재앙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아담이 지은 죄의 형벌을 대신 갚으심으로 삼대재앙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지은 모든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형벌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 때문에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과를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삼중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청산하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지도 못할 죄악의 계곡을 십자가 형틀로 다시 이으시고 메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지므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 영을 다시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짊어지고 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죄의 값을 갚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죄값을 갚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자기 죄를 청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값을 청산하신 예수님의 이름외에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많은 종교와 철학이 있고 또한 선행을 베풀며 수양과 도덕을 쌓을지라도 결코 죄악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광을 가져오시고 구원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는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재앙으로 인해 우리에게 있는 질병을 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의 뜰에서 매를 맞고 가슴과 등허리가 갈기갈기 찢어지셨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2000년 전에 이루신 축복으로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의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은 아담으로 인해 온 삼대재앙을 십자가에서 철폐하시고 우리를 저주와 질병과 영원한 멸망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2. 신앙이 자라고 복도 받기 위하여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축복도 받고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우리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이 은혜를 얻게 되지만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면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예수님의 삼중축복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머니 젖가슴에 늘 의지하며 부모의 보호하심과 돌봄가운데 평안히 자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장성하면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떠나 독립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육신의 자녀는 성장할수록 독립적인 삶을 이루려 하지만 영적으로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오히려 영적인 자녀로서 우리는 항상 주님께 의지하고 더욱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8절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주님께 더 의지해야만 합니다. 주님을 더 붙잡고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항상 성령안에서 자라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떨어지면 나무에서 꺾어진 포도나무 가지와 같아서 말라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통계를 보면 1996년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으면서 교회 출석률이 40%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이제 사람들은 주일에 산으로, 들로, 사업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여서 국민소득 1만 불이 된 다음 기도원 출석률도 30%로 떨어져서 열악한 기도원들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기독교 교인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당시 전쟁으로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 교회 출석률은 95%였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 영혼에 구원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워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가까이 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되면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 식어지고 느슨하게 되고 하나님을 뜨겁게 간절히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져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요하여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자신있다. 이제는 나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하늘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자기가 못나고 약하고 무능한 것을 깨닫고 언제나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갈 때 하늘나라가 마음속에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로 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져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속에 고난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때로부터 기도와 말씀 읽기를 게을리하고 하나님 찾기를 게을리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사탄을 따라서 세상 일락을 좋아하고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길을 막고 우리가 주님의 품안에 거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을 통한 고통으로 사람들은 깨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파야 밥을 찾고 목이 말라야 우물물을 찾듯이 고난이 다가와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언제나 인간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고난이 사라지면 또다시 게을러지고 자기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역대하 15장 2절에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야훼와 함께 하면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일하게 되면 주님을 버리게 되고 주님을 버리게 되면 주님도 우리를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아야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같이 간절히 찾아야 하는 분이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매일매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안에 거하게 됩니다. 역대하 15장 4절에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젊은 시절 작가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가족은 그의 방탕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딸이 “제발 가정으로 돌아와 착실한 아빠가 되어 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느강에 투신해 자살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기의 외딸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는데 그딸이 아버지의 방탕으로 좌절하고 절망해서 세느강에 투신 자살을 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 비극은 하나님께서 내게 내린 심판이다”라고 말하며 완전히 깨어져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후생사회국 관리가 되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교육부장관까지 지냈으며, 1862년에는 ‘아, 무정’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고난이 그를 깨뜨려 하나님을 찾게 했고, 지금까지도 존경 받는 문학가로 남아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으로 회개하고 깨어져서 하나님께로 다시 찾아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한 육신의 본능은 고난이 없으면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자꾸만 세상으로 세상으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깨어지게 합니다. 고난이 와야 말씀을 찾고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전쟁할 때 적군의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오면 참호에 엎드려서 그냥 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 격언에 의하면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기도의 선생입니다. 고난의 폭풍우가 밀려오면 누구든 두 말하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앉아도 기도하고, 서도 기도하고, 새벽에도 기도하고,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고난이 기도의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3. 바울이 당한 고난

 사도바울 선생은 하나님이 사용한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역사이래로 사도바울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이 능력있게 사용한 분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우리가 믿는 신학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로마서를 비롯하여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같은 주옥같은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계시를 받았던 바울도 극심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고난의 폭풍우속을 지나갈 때마다 그는 죽도록 주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할 때 신령한 세계속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선생은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통해서 자만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 보면 육체의 가시라는 것은 육체에 말뚝이 박혀있다는 의미입니다. 육체에 말뚝을 박아 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바울선생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선생은 앉으나 서나 고통가운데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와같은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내가 어떻게 살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육체가 괴로워 살수 없으니 날좀 놓아 주시옵소서’ 라는 간절한 기도를 세번 했을 때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날마나 죽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모든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환경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원래 부장 판사의 아들로 상류 가문에 태어나서 명문 사립고등학교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냉철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갑자기 소아마비 증세로 중증 장애인이 되면서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의지해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장애인이 되면서부터 온화한 이미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체 장애의 어려움을 통해 국민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지도자가 되었고, 서민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병과 싸우면서 습득한 도전 정신과 대담성은 경제 대공황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국민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또한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제2차 대전 동안 연합국을 리드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기념관에 들어서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루즈벨트 동상이 있고 거기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병은 그를 강인하게 만들었으며,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 뿐 아니라, 인내심을 길러 주었다” 육체의 연약이라는 가시를 통해서 루즈벨트는 상류층 귀족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을 끌어 안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일개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의 채찍을 통해 깨어지고 겸손하게 되므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가는 곳마다 마귀가 역사해서 능욕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능욕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잦은 궁핍한 환경으로 고생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7절에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씀하고 있고 고린도후서 11장 24절로 25절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26절에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선생의 기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속에 살았고 항상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도의 줄을 놓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하므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은 로마서 8장 35절과 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귀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하고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수 있는 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받는 축복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마귀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찾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고난은 우리를 깨뜨리시고 회개시키며 하나님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사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에 고난이 없으면 세상으로 흘러가 타락하고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이 없는 축복은 죽음이요, 저주인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축복과 함께 고난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