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삶을 좀 더 밝게 보며

by 삶의언어 posted May 27, 2024 Views 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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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소망/위로
예배드린 날 1990-01-28
오늘의 성구 요한복음 11장 38절로 40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Sk5--CzbR78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삶을 좀더 밝게 보며"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눈으로 들여다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이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압니다. 마음이 악한 사람은 아무리 가식을 해도 그 성품과 인격과 말에 악이 넘쳐 나옵니다. 마음에 더러움이 들어있는 사람은 아무리 거룩한 체하고 아무리 얌전한 체해도 그 성품과 말에 더러운 말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그 성품도 인격도 선하고 그 말에 선한 말이 나옵니다. 착한 사람은 마음이 착한 대로 그 성품도 착하고 인격도 착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착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앉아서 잠시동안 앉아 보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그 성품이나 그 인격은 그 마음의 상태를 대번에 읽어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부정적으로 가지면 모든 것이 어둡게 보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고 용기를 잃고 낙심하게 되며 이런 사람이 있으면 자기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부정적인 말을 하고 희망 없는 말을 해서 파괴적인 썩은 냄새를 가득 채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용기를 잃게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긍정적으로 갖게 되면 삶의 진행이 밝아 보이고 희망차 보이며 용기가 생기고 적극적이 되고 이러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낙심된 사람도 희망을 얻고 용기를 얻고 삶에 적극적인 태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운명은 그 마음가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그에서 남이니라" 또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악한 자는 그 마음에 쌓은 악으로 악한 말을 하고 선한 사람은 그 마음에 쌓은 선으로 말미암아 선한 말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미래도 사회나 민족의 미래도 그 구성원 되는 사람의 마음이 부정적이면 희망이 없고 파괴적입니다. 긍정적이면 크게 발전하고 그 개인과 사회 집단과 국가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인생과 사물과 역사를 좀더 밝게 보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둡게 보는 습관을 버리고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우리는 밝고 말고 환하게 보는 긍정적인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갖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첫째로, 부정과 긍정은 우리의 운명에 크나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은 정초가 다가오면 사주팔자를 봅니다. 손금을 보고 관상을 봅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사람의 운명은 사주나 팔자나 손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가짐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 바탕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데스 바네아에 왔습니다. 건너만 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하고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은총을 얻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열두 정탐군을 보내서 그 땅을 정탐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열두 명이 40주 40야를 정탐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열 명은 그 마음이 암울하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는 것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가서 모든 것을 밝고 맑고 환하게 보았습니다. 이 분들이 백성들에게 나와서 이제 보고 온 것을 보고할 때 열 사람이 말했습니다. "백성들이여, 우리가 가본 땅은 산은 높고 골은 깊고 땅은 척박하여 그 백성을 삼키고 있다. 성은 --(뒷면)-- 그곳에 사는 사람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이 살고 있어 우리들 자신을 비교해 보니 우리는 여치 새끼 같더라 우리가 쳐들어가면 반드시 패하여 우리의 처자들은 포로로 잡히고 우리는 전부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약속해서 복으로 준 땅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다는 것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다 그 영향력을 받고서 물소듬같이 그 마음이 낙심이 되어서 땅을 치고 통곡하고 탄식을 하고 그리고 난 다음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모세를 반역하고 장관을 세워서 다시 종살이하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일어나서 백성을 안돈해서 갈렙이 말하기를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들이라 우리가 들어가 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라 물론 그곳에 성벽은 높고 네피림의 후손 대장부 아낙 자손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들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이미 그들을 떠났다 우리들이 들어가면 점령할 수 있다. 들어가서 점령하자." 그들은 똑같이 열 사람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정적으로 밝고 맑게 인생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돌을 들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쳐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이럴 때 찬란한 구름이 나타나더니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사 그 자리에서 열 명의 정탐군은 쳐서 죽이고 마음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돌이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앞에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회진하여 광야 사막길에 들어가서 40년을 방황하면서 그들이 모두다 그곳에서 죽어 뼈가 태양에 발해지게 할 때까지 하나님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긍정적으로 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80에도 40대의 청춘의 힘을 가지고 그 후손들을 올바르게 긍정적으로 훈련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가 그 땅에 못 들어가게 했나요? 땅이 막았나요? 하나님이 막았나요? 사주팔자가 막았나요? 천만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그대로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땅에 못 들어간 것은 마음을 부정적으로 가졌기 때문에 못 들어간 것입니다.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신약성경의 베드로를 보십시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파도는 치고 바람은 부는데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다 놀라서 고함을 치는데 예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시면 나로 물위를 걸어오게 하소서" 예수님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말씀에 집중한 베드로는 마음속이 긍정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는 마음이 긍정적이 되어서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일어나서 그는 배 밖으로 나와서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일진광풍이 불어와서 물보라가 베드로를 치매 베드로는 그만 놀래서 물과 그리고 바람을 바라보고 놀라서 무서워했습니다. 그 마음이 부정적이 되자 즉시로 물에 빠졌습니다. 누가 베드로를 물에 빠지게 했나요? 바람이냐? 물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닙니다. 환경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갈릴리 바다도 옛날 바다와 똑같은 바다였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여전히 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고 언제는 가라앉았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베드로의 마음의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믿을 때는 물위로 걸어갔지만 그가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와서 두려워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원망해야 됩니다. 자신의 마음의 가짐이 운명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민을 가라. 그래야 천국에 가까이 온다 그렇게 말했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란 말은 마음과 생각을 바꾸란 말입니다. 단호해야 합니다. 내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추한 마음을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불의한 마음을 의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변화시켜라, 생각을 변화시켜라, 그래야 천국이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내버려 놓고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 사주필자를 믿는 그런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일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인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는 부모를 잃고 세 형제 자매가 살았습니다. 그것도 또 베다니라는 빈민굴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굶주린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 예루살렘의 부자들, 학자들, 권력자들과 살지 아니하고 그곳에 가서 일은 하셨지만 주무실 때는 언제나 베다니에 나와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같이 주무셨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외로운 부모를 잃어버린 이 남매들과 함께 같이 지냈기 때문에 굉장히 주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 멀리 계셨는데 나사로가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미처 예수님이 올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한지 나흘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은 생각 안하고 죽은 오라버니 생각으로 마음이 꽉 들어찬 것입니다. 그들은 오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당한 그 무서운 충격을 받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무덤 속에 들어간 오빠의 이미지밖에 마음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오빠는 무덤 속에 들어갔다, 이제는 소망이 없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그 절망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마르다가 뛰어나가서 주님이 나흘 전에 이곳에 오셨으면 오라버니가 죽이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오라버니의 죽음에 대한 그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 마음을 온통 점령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곁에 와 있어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생 마리아가 와서 또 탄식했습니다. 주께서 이곳에 계셨더먼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오라버니의 죽음만 생각했지 예수님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보시고 예수님이 통분히 여기시고 원통하게 여기시고 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강제로 데리고 가셔서 그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가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보고 말했습니다. "마르다야,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아라." 이 말은 뭡니까? 죽음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마음의 태도를 바꾸라. 너희 마음에는 죽은 오라버니만 꽉 들어차 있지만 왜 죽은 자를 살리는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 부활이요 생명인 내가 너 앞에 있는데 나는 안 바라보고 무덤 속에 있는 오라버니만 생각하느냐. 태도를 바꾸라.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아라.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했습니다. "주여,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지금 썩은 냄새가 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썩은 냄새가 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주님이 듣기에 석은 냄새가 나는 말인 것입니다. 왜? 그들 마음속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그들은 난 할 수 없다. 못한다. 안 된다. 절망이란 죽음의 시체를 그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왔다갔다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의식과 형식은 다 지키면서도 그들은 그들 마음에 있는 그 죽음의 돌문을 옮겨 놓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여전히 절망적입니다. 여전히 소망이 없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썩은 냄새가 나는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그 태도를 변화시키기 전에는 주님께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르다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와 계셔도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역사 할 수 없습니다. 역사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 하실 수 없는 유일한 조건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동네에 가서 큰 역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지 않는 이상은 그들이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늘 죽었고 늘 썩은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기적을 믿지 않는 이상 여러분 속에 있는 죽은 나사로의 문제는 언제나 죽어 있고 언제나 썩은 냄새가 납니다. 사람의 힘으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나요? 사람의 힘으로 썩은 냄새를 배제할 수 있나요? 할 수 없거든 불신앙의 문을 제쳐놓고 주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으란 말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파괴적인 잘못된 신앙을 회개하고 자복 하고 씻어내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 자기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았기 때문에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 부르짖지 않나요? 왜 그 속에 썩은 나사로를 가지고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나요? 회개했으면 되었을 것인데 자백하면 될 것인데 그 무덤의 문을 옮겨 놓고 그 돌을 굴려 놓고 '주여, 이 썩은 나사로가 있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못 살립니다. 주께서 도와 주소서.'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절망을 믿지 말고 소망과 기적을 믿는 증표로써 마르다는 무덤의 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것은 마르다의 마음의 태도를 바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마음의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달려들어서 그 무덤 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무덤 문에 열리고 썩은 냄새가 나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예수님은 그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말 한 마디에 사망은 생명을 썩은 냄새는 살아 있는 향기로 절망은 소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죽은 나사로는 살아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방법대로 인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의 문제는 예수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붙잡고 아무리 울어 봤자 썩은 냄새밖에 안 납니다. 그 문제를 예수님 앞에 내 놓으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방법으로 죽은 나사로의 문제를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마십시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오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바라보지 못하고 진흙창에 빠져서 영혼이 안됨 같이 범사도 안 되고 병들어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1990년 새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문제 해결이 바깥에 있지 않고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수평적인 인생을 살지 않고 수직적인 인생을 삽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면 그 수평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위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일을 내가 더하여 주리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썩은 나사로는 항상 죽어 썩어 있고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면 삶을 좀더 밝게 보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의 무능력과 환경의 절망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든지 사람은 무능력하고 어느 누구에든지 환경의 절망은 다가왔다가는 지나가고 또 다가오곤 하는 것입니다. 이 환경의 무능력과 절망만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그것은 커집니다.
저는 어릴 때 여름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노인들이 마당에 모여서 새끼를 꼬든지 또는 이 삼태기 껍질을 벗기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들은 늘 하는 말이 조그마한 빗자루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저녁에는 허깨비가 된다고 했습니다. 밤에 누가 술을 먹고 가다 길에서 허깨비를 만났는데 밤새 어떻게 되었다는 그런 오싹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때 그 영감님들이 하는 말이 허깨비가 나오면 쳐다보면 자꾸 키가 커져서 하늘까지 높아지고 내려다보면 그것은 아주 조그마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 허깨비를 보고도 내려다보지 쳐다보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엉터리 같은 말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제게는 그것이 시사하는 의미가 깊습니다.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이 어려워질 때 그것을 자꾸 쳐다보면 그것이 커집니다. 온 천지가 아득해지고 절망이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나갈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력과 환경의 절망만 바라보면 침몰합니다. 견뎌내지 못합니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우리의 갈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용서의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버림받았다고 하는 심령에는 화목의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병든 자에게는 치료의 문을 열어 놓았으며 저주받은 자에게는 아브라함의 복의 문을 열어 놓았으며 죽는 자에게는 천국 영생의 문을 십자가를 통하여 열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TM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법사에 잘되며 강건한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고난과 환경에 처했을 때 집중적으로 바라볼 것은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데 허덕였다가는 영원한 수렁에 빠져서 허덕이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예수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우리에게 빛을 비춰줄 분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을 좀더 밝게 보며 살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그 대속의 은총을 마음속에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좋은 설교 좋은 테잎, 비디오, 좋은 방송을 듣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신앙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있다" 서로 도와주는 것 필요합니다. 굉장히 필요합니다.
저는 한 두 주간 동안 굉장히 최근에 와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시련이 아닌 위장병이었습니다. 저는 늘 병자 위해서 기도하며 살았고 투철한 신유의 믿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병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어떤 병이 다가와도 제가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몇 시간 아니면 며칠 이내에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번에는 제가 지독하게 위장병에 걸렸는데 밥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먹으면 다 올라오고 멀건 미음만 먹고 그리고 계속해서 주일 설교하고 삼일 설교하고 심방은 계속합니다. 내가 병원의 환자를 위해서 심방을 가는데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서 '환자가 환자 위해서 기도하러 간다.' 정말 기가 막히더라구요.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사람에게 손을 얹고 내가 주님, 이 사람을 위해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데 나 는 그보다 더 병든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그렇게 아파 본 적은 처음입니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아 이제 가려나 보다.' 사람이 그렇게 비관적인 마음을 먹으니까 자식들 봐도 눈물이 나고 환경을 봐도 눈물이 나고 최자실 목사님이 불광동에서 나와 함께 목회를 시작하더니만 가는 것도 함께 가자고 하는구나. 그런 비관적인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실 나는 굉장히 심한 위장병을 앓았습니다. 그 동안 너무 시간을 안 지키고 밥 먹고 점심을 저녁 시간에 먹고 아침은 안 먹고 일만 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더니 그것이 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암이다, 남자는 40대, 50대 위장병이라면 암이다. 이제 너는 죽었다.' 참 큰일났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를 두고 일은 한없이 벌여 놓고 내가 살아 있어야 하나님 사업을 계속 이끌어 나가겠는데 이것 어떻게 하나? 그럴 때 여러분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 누굽니까? 우리 교인들입니다. 나는 그래서 요번에 시험했습니다. '내가 30년 목회 잘 했구나.' 우리 성도들 만나는 사람마다 제게 와서 용기를 주었습니다. "목사님, 웃기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안 죽습니다. 절대로 안 죽어요. 보증합니다. 우리가 있는데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우리를 먼저 천당 올려 보내고 뒤에 따라 와야지 무슨 소리합니까. 절대로 절대로 암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데요." 어떤 권사님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92살까지 살게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내게 와서 "목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목사님 92살까지 살게 하신대요." 내가 왜 웃었냐면 92살 전에 예수님 오실 텐데 그 권사님이 지어서 하는 말이라고, 내게 용기 준다고,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오는 것마다 제게 아서 그런 격려의 말을 해 주고 기도해 줄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목사였던 내가 항상 그들이 낙심할 때 말씀하고 기도해 주었던 내가 이제 거꾸로 내게 성도들이 와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말씀을 읽어 주고 격려를 해 주는데 굉장한 힘이 생깁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할 때 좋은 설교를 듣고 테잎을 듣고 방송을 듣고 성경을 읽는 것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그 결과로 내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졌습니다. 어두움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아차, 내가 마귀의 시험에 떨어졌구나.' 그래서 집중적으로 마귀를 공략하고 요사이 있는 힘을 다해서 기도하고 그래서 저번 주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서서히 이기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다 이겼습니다. 이제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 굉장히 괴롭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먹어도 소화가 되요. 이제는 승리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덕분입니다. 이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혼자서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나 혼자서 말하고 싶다고 할 말 다하고 내 생각대로 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공동 생활입니다. 부부간에 같이 살아도 설로 절제하고 살아야 됩니다. 남편이 자기 말하고 싶다고 다 하나요? 부인이 자기 말하고 싶다고 다하나요? 우리 형제간에 살아도 자기 말하고 싶다고 다 말하나요? 모든 것은 절제하는 그와 함께 신앙도 우리가 한 사람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같은 신앙 동지로서 주일 모이고 수요일 모이고 구역 예배 모이고 가정 예배를 드리고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용기를 주면 이로써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의 양식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밥을 못 먹어도 연약해지는데 마음에 올바른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 신앙은 피폐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되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한 15분, 30분하고 맙니다. 어떠한 사람은 기도를 한 시간쯤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한시간 깊이 합니다. 이것은 마치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물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하루에 한 10분쯤 하는 사람은 그저 발목에 물이 찰랑거리는 정도입니다. 발목에 찰랑거리는 정도의 성령의 은혜를 가지고 그는 이 세상에 신앙을 승리하고 살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한 30분쯤 하는 사람은 물이 무릎까지 찰랑거리는 사람입니다. 무릎까지 찰랑거리는 정도만 가지고는 인생을 승리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적어도 한 시간쯤 하는 사람은 이제 물이 허리까지 차는 사람인 것입니다. 허리까지 차 있으니까 그는 상당히 하나님의 능력이 허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한 시간 이상 하는 사람은 성령의 물에 헤엄을 치는 것입니다. 성령에 헤엄을 쳐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헤엄을 치면 성령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능력과 권세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에 잡혀서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 한 시간 이상 매일같이 기도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싫어요. 왜냐하면 육체는 기도를 싫어합니다. 기도하기 싫어요. 왜냐하면 마귀는 기도를 저항합니다. 그래서 온갖 변명을 다하고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을 적게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심하고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기도해야 여러분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헤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하나님 편에서 밝고 맑고 환하게 보며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진다 해도 그것은 먼지와 티끌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 마음속에 중심이 잡히고 그 마음속에 의가 그 중심에 잡히지 아니하고 인생을 사는 것은 거짓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의를 잃어버린 인생은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지혜가 있고 아무리 명예가 있어도 그것은 다 헌신짝이요 그것은 먼지인 것입니다. 티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는데 입의 말이 그 사람을 묶습니다. 사람은 말을 함으로써 생각합니다. 내가 가면 내가 가야지, 내가 와야지, 자기가 늘 말하면서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세수하러 들어가면 내가 그럽니다. "찬물로 세수해야지." 아무도 안 보는데 "찬물로 해야지. 칫솔은 한 가지 종류만 쓰면 안 좋다더라. 긴 것도 쓰고 짧은 것도 써야지. 타월로 닦아야지, 조그마한 걸로. 크림을 바르지 말고 로션을 발라야지." 나 혼자서 늘 중얼거리면서 내가 일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통해서 생각하고 생각을 통해서 말합니다. 말과 생각은 손의 앞과 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입술의 말로써 자기가 묶이고 입술의 말로 사로잡힙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은 별 볼일 없이 그 생각이 더러움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별 도리 없이 그 마음에 음란이 꽉 차 있습니다. 탐욕스런 말을 하면 그 마음속에 탐욕이 꽉 들어찹니다. 변명할 것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입술의 말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의롭고 평화스럽고 즐거움으로 찬 올바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을 올바르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올바른 신앙에 섭니다. 기도를 고함쳐 한다고 올바른 사람되는 것 아닙니다. 금식 많이 했다고 그것으로 올바른 사람되는 것 아닙니다. 사람은 그 속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입술에서 올바른 말을 해야 올바른 신앙 생활에 긍정적인 말을 할 줄 알아야 의로운 말을 할 줄 알아야 거룩한 말을 할 줄 알아야 깨끗한 말을 할 줄 알아야 그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말이 시원치 않은 사람은 그 인격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학위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쓰레기요 쓰레기더미입니다. 나는 30년 동안 목회를 하고 목사니까 목회를 해 오면서 수많은 사람은 만났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누구를 통해서 압니까? 저는 저의 뼈에 사무친 경험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사람과 앉아서 10분만 얘기해 보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향기가 나는지 나사로의 죽은 썩은 냄새가 나는지 압니다. 물론 나는 목사니까 모든 사람을 건지고 살리려고 하지요. 하지만 마음에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이 어떤 때는 하늘에 사무칩니다. 그러므로 금년도에는 여러분, 말로써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십시오. 네 입의 말로 네가 사로잡혀서 네 입의 말로 네가 잡힘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옛말에 울어 보고 웃어보니 웃는 게 낫더라고 하는 말처럼 이 세상에 울면서 살지 말고 웃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저기압을 품고 부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며 절망적인 말을 하고 사는 사람은 내일이 없습니다. 왜? 이미 죽었습니다. 이미 부정적인 사람은 이미 무덤에 들어갔고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데 이미 내일이 없습니다. 그 죽어서 하는 말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담에 하늘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스스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겠다고 노력하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손길을 베풀어서 그 사람을 영광에서 영광으로 끌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도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 중심에 서서 어떠한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우리 마음의 생각과 우리 마음의 바탕과 우리의 말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다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사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우리를 걸머지고 올라가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고 갖은 고난 다 당하셔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아버지,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지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니 변화를 받아야지요.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운명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작정하여도 그 승산을 야훼께 있사오니 수직적인 인생을 살게 도와 주시옵시고 수평적인 인생을 살지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이고 십자가의 그 은공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승리적인 삶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