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드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by 삶의언어 posted May 19, 2024 Views 3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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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신앙성숙
예배드린 날 2005-01-16
오늘의 성구 누가복음 6장 18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TRw1ExXw_R4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드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동북쪽으로부터 요단강물을 받아서 그 물을 서남쪽으로 흘러 보내는 살아있는 호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수원으로 전체 물 공급의 35%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호수에는 여덟 종류의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간 어획량도 5천 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1964년 완공된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스라엘 전역에 물을 공급함으로써 불모의 땅을 초지와 농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와 정반대 현상으로 사해는 요단강으로부터 매일 5백만 톤의 물을 받아 들이지만 어느 곳으로도 물을 나누지 않습니다. 흘러 보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열에 물이 증발해서 염분이 쌓여 죽음의 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염분이 많은지 염도가 보통 바닷물의 5,6%보다 무려 5배가 넘는 25%에서 30%가 됩니다. 이런 물에서는 절대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물의 소금결정들이 떠다니고 이것이 모여 소금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똑같은 요단강물을 받으면서 갈릴리 호수는 살아있는 호수지만 사해는 죽은 호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물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 그것을 자꾸 흘러 보내고 나누는 것을 통해서 갈릴리 호수는 살아있지만 받아만 들이고 나누지 않고 흘러 내보내지 않는 사해는 소금바다, 죽음의 바다가 되고만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에서 만물을 지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짓기 전에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를 사람에게 주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로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배필을 주셨습니다. 하와를 주셔서 도움을 받고 함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상함도 해함도 없는 극락의 처소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은 저들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금부터 2천년전에 타락하고 반역한 인생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셨습니다. 치료와 건강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셨습니다.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삶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다 하나님이 주셔서 이를 받아서 누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달라고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항상 주시고 또 주시고 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2. 달라고만 하는 존재
그런데 이 우주에는 주지 않고 달라고만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빼앗고 취하고 욕심을 내고 탐욕으로 군림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는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천사장 루시퍼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보좌를 넘겨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드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이사야 14장 13절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고 말했었습니다.
탐욕의 존재인 것입니다. 아담도 한가지입니다. 이 마귀의 꾀임을 받은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지 아니하고 탐욕을 내어서 하나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노려보았었습니다. 그것까지 달라고 했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했습니다. 오늘날 사는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종이요,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태어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태어나고 한평생을 탐욕에 질질 끌려서 살다가 인생을 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탐욕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절대로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더 가지려고 하고 더욱 더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마치 바닷물을 마신 사람과 같습니다. 소금끼가 목에 붙으면 자꾸 물이 마시고 싶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서 바닷물을 마신 사람은 배가 남산만하게 되어도 계속 물을 마시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1993년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남자가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에 해당하는 복권에 당첨 되었는데 다음날 살인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이 조사해 보니 복권 당첨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파티에서 17살 먹은 여동생이 당첨금을 좀 나누어 가지자고 하니까 격노해 가지고서 칼로 여동생을 찔러 죽여 버렸었습니다. 공짜로 3억이 생겼으면 여동생 하나 있는데 좀 나눠 달라고 하면 한 1억쯤 줘도 괜찮잖아요. 그래도 2억이 남잖아요. 그런데도 공짜로 생긴 3억이 탐욕으로 꽉 들어찬 그에게는 모자라게 보였습니다. 좀 나누어 달라는 여동생을 칼로 찔러 죽여 버리고 3억도 취하지 못하고 감방신세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사람은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채워 주어도 나누기에 인색합니다. 항상 더 갖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멸망당하는 것이 오늘날 인간의 존재인 것입니다. 왜 인생은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눈은 보아도 다함이 없고 귀는 들어 만족함이 없습니다. 음식을 먹어서 만족하지 않아요. 금을 갖고 은을 갖고 부귀와 영화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기를 원합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쥐면 나누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못살고 죽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된다는 것이 탐욕의 근본적인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탐욕에 붙잡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에 어진 신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왕이 밥상을 보고 “나라가 잘살게 되는데 왜 식탁에 상아 젓가락이 오르지 않고 아직도 나무젓가락이 오르느냐?”고 젓가락을 던지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그 어진 신하는 몹시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그 왕의 젓가락 때문에 고민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 왕의 젓가락 하나 바꾸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고민하는가?” 그러자 그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얘기 하지 말게. 상아 젓가락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그리 단순하지 않네. 상아 젓가락을 장만하면 그 다음은 금그릇을 가져 오너라. 그 다음에는 산해진미로 밥상을 채워라. 다음은 나무상 말고 금상을 만들어라. 다음은 아방궁을 장만하라. 끝없이 임금이 탐욕을 낼 것인데 백성들이 얼마나 그를 채우기 위해서 세금을 찬탈 당하고 고생할 것인가. 그러므로 자기가 고민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한번 탐욕에 빠지기 시작하면 탐욕이 채워져도 절대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더 가지기 위해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류역사를 보아도 강대한 나라가 탐욕을 내어서 이웃나라를 쳐서 합치면 또 이웃나라. 건너나라를 쳐서 합치면 또 이웃나라. 끝없는 탐욕으로 수많은 나라를 접수하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은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인생은 더 갖기 위해서 싸우고 더 갖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로 2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다투고 싸우는 이유가 욕심을 내고 탐욕을 내어서 더 가지고 더 얻고 빼앗기 위한 발버둥인 것입니다. 더 갖기 위한 싸움이 우리 사회, 개인적 사회적인 노사갈등, 지역갈등 등으로 표출되고 있잖아요. 우리나라가 못살 때는 노사분쟁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자 점점 노사갈등과 노사분쟁이 심해졌습니다. 없을 때 서로 분쟁할 것 같은데 없을 때는 분쟁하지 아니하고 전에 보다 훨씬 잘살게 되고 더 많이 소유하게 되자 더 많이 갖기 위해서 분쟁이 심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노사분규는 외환위기 이후 98년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3일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노사분규 발견건수는 지난 97년 78건을 기록하였으나 98년은 129건으로 급증한 이후 99년에는 198년, 2000년에는 250건, 2002년에는 320여건등 해마다 증가추세를 보였습니다. 잘살아갈수록 싸움이 더 심합니다. 월급이 많을수록 노사분쟁은 더 심해집니다. 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탐욕이 발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갖기 위한 싸움은 노사간에도 끊임없는 분쟁으로 나타나고 사회와 계층과 지역간에도 끝없는 분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영국의 런던대학교의 한 교수가 54개국을 대상으로 어떤 나라 국민이 더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가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었습니다. 여러분 들어 보세요. 이 지구상 54개국에서 제일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고 행복하다고 생각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압니까? 1위가 방글라데시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가장 못사는 나라 국민이 제일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나왔습니다. 3위가 나이지리아, 5위가 인도로 상위권을 모두 가난한 나라가 차지했습니다. 반면 최강국이라고 하는 미국은 54개국 중에 46위, 일본은 54개국 중에 44위, 독일은 54개국 중에 42위를 차지했고, 복지국가로 유명한 스위스가 41위, 자유의 나라 프랑스가 37위, 영국이 32위, 우리나라는 행복지수가 몇 위가 될 것 같습니까? 54개국 중에. 23위에 그쳤습니다. 방글라데시보다 엄청나게 잘사는데 국민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방글라데시가 1등이요, 우리나라는 54개국 중에 23위에 그쳤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일정한 소득수준이 넘으면 오히려 소득이 늘어갈수록 행복한 마이너스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 탐욕으로 인해 오히려 행복을 잃고 불행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심방을 했는데 가장 가난한 60년대로부터 오늘날 2005년도까지 지나오면서 보니까 가장 내가 심방해서 우리 성도들 중에 잘 웃는 성도들은 가난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만 아주 너털웃음을 웃고 잘 웃어요. 그러나 부자일수록 웃지 않고. 참 이상하게 가난한 사람일수록 탐욕에서 해방이 되니까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음식도 잘 못 먹어도 마음에 부담이 없이 행복하게 웃어요. 그러나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 살면서도 마음에 욕심이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더 잘 못산다고 더 넉넉하지 못하다고 불평과 원망이 있어 행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복은 가진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탐욕에서 해방되어야 비로서 행복하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드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들처럼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서 탐욕에서 해방된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탐욕의 노예가 된 옛사람은 지나가 버리고 탐욕에서 해방되어 드리는 사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 아담의 사람, 탐욕의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로마서 6장 2절로 3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물에 들어가서 장사지내 버리고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은 죽고 장사지내고 새사람으로 우리가 부활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 새생명 즉,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야 돼요. 옛사람이 아닙니다. 탐욕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드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로 11절 우리 소리 내어 함께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탐욕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드리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목사이며 사회사업가인 조지 뮬러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년에 기자가 찾아가서 어떻게 평생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죠지 뮬러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잡힌 옛날 죠지 뮬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죽고 장사지내고 새로운 죠지 뮬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평판, 선택, 좋은 것과 싫은 것, 원망 등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옛사람 죠지 뮬러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죽었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죠지 뮬러는 자기의 지위, 명예, 권세, 돈, 쾌락, 세상을 다 비워 버리고 예수님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는 크게 일생을 드리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을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내 인생 내가 살지만 내가 삶의 주인이지만 예수 안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십니까? 예수님은 오직 섬기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섬김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이 내 인생을 살아주시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면 우리의 삶은 이제 아담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5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 것은 우리가 죽어 섬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섬기고 나누어 주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나오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합니다. 옛날에 시골에 우리 집이 과수원 할 때 개를 많이 기르는데 한번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너무 새끼를 많이 낳았습니다. 이 새끼들이 엄마에게 달라 들어서 젖을 하도 빠니까 나중에는 엄마가 일어나서 새끼를 틀어 버리고 도망을 치는데 새끼들이 그냥 아귀같이 쫓아가요. 그것이 늘 기억납니다. 너무도 새끼가 젖을 빠니까 어미가 살수가 없어서 새끼를 틀어 버리고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어찌나 온 세계 교인들이 하나님께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니까 하나님도 도망쳐야 돼요. 하나님도 못 견디게 만든다. 우리가 자꾸 달라는 것은 탐욕에 젖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돼요.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4. 성도의 삶의 원리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원리는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으로 달라는 루시퍼는 쫓겨났습니다. 탐욕으로 달라던 아담도 쫓겨났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왜, 탐욕은 마귀의 속성이요, 타락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는 것보다도 먼저 드리면 하나님이 갚아 주시되 후히 되어서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게 해서 안겨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좋게 해주기를 원하지만 탐욕을 가진 사람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은 같이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천당에 가면 뭐하는 줄 압니까? 천당에 가서도 하나님 앞에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는 줄 압니까?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께 하는 것은 찬양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0절로 11절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성수주일하고 그리고 수요예배도 오고, 구역예배도 가고, 십일조 드리고, 선교, 감사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겨야죠. 무조건하고 싸고 달라고 손만 내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부자집 옆에 살았는데 겨울에 추운데 눈은 내리고 출출합니다. 과부 부인이 바느질을 해서 애들을 키우고 먹고 사는데 애들은 철도 없이 “엄마~ 출출해 무엇을 줘! 이웃집 봐라. 떡을 찧지 않아? 떡방아 소리가 나지 않아? 엄마 이웃집은 떡을 먹는데 우리는 뭘 좀 안줘?” 줄게 있어야지. 엄마가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만 “그래 잠시 있어라. 내가 떡을 먹게 해주마!” 부엌에 나가서는 조금 있는 보리쌀로써 보리 누룽지를 만듭니다. “에이~ 엄마! 보리 누룽지 아니야? 아이고 이제는 먹기에도 귀찮은 보리 누룽지를 만들어?” “가만히 있어봐라! 보리누룽지가 떡이 될 것이다.” 보리 누룽지를 만들어서 소쿠리에 담아서 밥보로 잘 덮어서 맏딸보고 “야 이것 이웃집에 갔다줘라. 아주머니에게 엄마가 보리 누룽지를 만들었는데 너무 맛이 있어서 나누어 먹자고 갖다 드리랍디다.” “아이! 나는 보리 누룽지 가지고 안 갈래” “무조건 하고 엄마가 시기는 대로 해라!” 그래서 이웃집에 문을 두드리니까 종이 문을 열었어요. 그것 들고 들어가서 “아주머니 계세요?” “왜 그래” “우리 어머니가요. 날도 춥고 눈도 내리고 출출해서 보리 누룽지를 만드는데 너무나 맛있다고 나누어 먹자고 드립디다.” 그러니까 보고 자기 집의 개도 안 먹는 보리 누룽지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성이 고마우니까 “야~ 맛있게 보인다. 잘 먹는다고 엄마에게 말해라.” 그리고 여종을 불러서 “야~ 지금 솥에서 막 찌은 떡을 이 바구니에 잔뜩 담아서 보내라!” 자기들도 먹기 전에 그 떡을 먼저 바구니에 담아서 이웃에 보냈습니다. 이웃을 방문한 이 소녀가 소쿠리에 떡을 잔뜩 담고 춤을 추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보리 누룽지가 떡으로 변했습니다. 왜요,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요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주므로 받는 것이지 인생이란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을 드리면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드리지도 아니하고 자꾸 달라고만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과 봉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이름을 알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사람으로 크리스챤으로써 해야 될 삶의 첫째 원리는 항상 하나님께 먼저 예배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헌신과 봉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드리기 전에 구하는 것은 탐욕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크리스챤이 살아가는 원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이웃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으시대면 오히려 손가락질 받고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습니다. 내가 팔순이라도 이웃의 모든 일에 같이 협조하고 섬기면 아무 말 안 해도 이웃 사람들이 존경하고 우리를 섬겨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으니 먼저 대접해야 돼요. 자식도 부모를 잘 대접하면 부모가 잘 대접한 그 자식에게 한몫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섬기면 이웃이 대소지간에 함께 사랑을 돌려주고 존경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써 이웃을 섬기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누면 더 많아집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어린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누어 주니까 주님이 축복하셔서 남자만 5천명, 부녀자 기만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나누어 줄 때 주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오병이어를 혼자 쥐고 있을 때는 주님이 복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군중을 위해서 나누어 줄 때 주님이 복을 주어서 풍성하게 하시고 나중에 열두바구니 남은 것 누구 주었겠습니까? 이 소년에게 돌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는 말씀이 정말인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호로 유명했던 카네기는 “재산을 가지고 죽은 것은 인간으로써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원래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경제불황으로 인해 1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평생 그가 배운 교육은 초등학교 4학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크리스챤으로써 나누어 주는 원리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법칙을 통해서 큰 부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된 후 그 돈을 사회에 환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교육, 문화, 예술, 구제, 평화를 위해 여러 연구소를 설립했고 자선사업에 크게 투자했습니다. 예술를 위해 카네기홀을 건축하고 그 외에도 카네기 연구소, 카네기 기금,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각 지방 교회에 약 7천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하고 2천 8백 곳 이상의 도서관에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카네기가 생전에 사회에 기증한 돈은 지금으로 따지면 몇 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가 늘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카네기에게 끊임없는 축복을 부어 주었고 그 이름이 사후에도 온 천하에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물질을 주신 것은 이웃을 섬기고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로 19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섬기고 나누어 주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돕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꾸 도와 달라고 하지 말고 돕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옛말에 처자를 자랑하면 팔푼이라고 했는데 제가 이제 나이 70이 되니까 마누라 자랑해도 팔푼이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랑 안했어요. 팔푼이 안 될라고. 그런데 이제 70이 된 나는 가만히 나하고 40여 평생을 살아온 마누라를 볼 때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안 할려고 했는데 내가 김삼환 목사에게 배웠습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내가 매일 저녁 8시 반부터 봅니다. 굉장히 은혜로워서 보는데 김삼환 목사님이 텔레비에서 자기 부인 자랑을 잔뜩 하더라구. 그래서 ‘아~ 부인 자랑해도 팔푼이가 안 되는구나!’ 왜 내가 우리 집 사람을 존경하느냐 하면은 아무 말 안하고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30여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30여명의 노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가 고아원을 세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입을 절약하고 절약해서 고아들을 다 30여명을 돌보고 있습니다. 또 우리 기도원에 가면 가나안 양로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우리 집사람이 세워가지고서 30여명의 노인들을 지극히 돌봅니다. 늘 위해서 기도하고 좋은 것 있으면 다 그리 가지고 가는데 우리 성도들이 나 먹으라고 약을 많이 갖다 주는데 비타민제하고 갖다만 주면 없어져 버려요. “어디 가져갔느냐?” “양로원에 갖다 줬다.” “여보, 우리 아들이 나 건강하라고 발마사지기를 사다 줬어요. 전기 꽂으면 물이 부글부글 끓어서 발 족욕한다 말이에요. 발을 마사지 합니다. 그것을 내가 하려고 찾아보니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이 발 마사지 하는 기계 어떻게 했어요?“ ”양로원에 갖다 줬다“고 합니다. 좋은 것 있으면 다 갖다 줍니다. 내가 그래서 같이 사는 아내이지만 존경하는 것은 한평생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아니하고 30명의 고아를 돌보고 30여명의 노인들을 자기 친 부모 모시듯이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것을 보고 감격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릅니다. 뭘 하느냐고 그럽니다. 이제 남편 된 내가 자랑을 해줘야지 누가 자랑을 해주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야~ 나보다 천당가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 앉겠구나. 내가 가면서 “천당가서 높은자리 올라가거든 낮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챤은 고난당한 자를 돕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을 비평하고 비난하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우리가 좋은 것을 나누어 주고 함께 도와주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참된 크리스챤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로 12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합니다.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서 집에 가서 부부간에 싸우고 이웃하고 다투고 탐욕을 부리면 그 신앙은 무슨 신앙입니까? 허위요, 가식이요, 위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그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기도 많이 하고 신령하다고 하면서 앉으나 서나 이웃을 벗기고 할퀴고 먹칠하고 짓밟고 짓이기면서 “아~ 나는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이다. 신앙으로 산다.” 거짓말입니다. 가짜입니다. 엉터리입니다. 사탄입니다. 왜?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웃을 치료해주고 다독거려 주고 용기를 주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무엇이 경건한 것입니까? 무엇이 신령한 것입니까? 무엇이 아름다운 것입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 경건과 신령한 것과 아름다움이 진짜인 것입니다. 사랑이 동반하지 않는 신앙생활이나 경건은 다 가짜요, 허위요,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했지만 옛날에 서대문에 있을 때 우리 교회에 주의 종이 되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면담을 하는데 아주 자기는 삼각산에서 금식기도도 많이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헌신적으로 충성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가족관계를 물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까?” “우리 집사람 있지요.” “자식들은요?” 자식들도 셋이나 넷 있다고 그래요. “그럼 지금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라고 그러더라구요. 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뭐라고요?” 그러니까 어깨를 짝 펴더니만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면을 쳐다보고서 “나도 당신을 분토와 같이 버리노라.”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족을 분토와 같이 버린 그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성경에는 자기 친족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행사나 신령한 행동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엉터리입니다.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구원받지 못한 아담의 옛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탐욕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 욕심으로 살고 달라고만 하지만은 우리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새로 부활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가 내 인생을 살아주기 때문에 우리는 섬기는 삶을 살고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이것이 참된 크리스챤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당하는 자를 도우며 살아야 돼요. 현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매년 6조 5천억 달라로 한화로 6,050조원에 달하며 세계 자원의 3분의 2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1년 평균 수입은 4,500달러로 이는 비 그리스도인들의 3배에 달한다고 월드 크리스챤 알마넥 1998년 통계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부의 3분의 2를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세상의 부자들 중에 3분의 2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온 세계 크리스챤들 다 합치면 1년 평균 수입이 4,500달러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3배에 달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부를 많이 주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섬기라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내 인생만 잘살게 할려고 주님이 주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이 더욱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짧은 시간 동안에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한국에 다른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우리 크리스챤이 보기에는 1,200만 기독교 신자들이 이 땅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수많은 자선사업을 합니다. 수많이 나누어 줍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여의도순복음교회 큰 교회가 뭘 하냐고 합니다. 이번에도 서남아에 큰 재난이 생겼을 때 그 보고를 받자마자 저는 밤새토록 잠을 못 잤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이튿날 우리 교회가 시작한 NGO 즉, 비정부기구인 선한 사람을 지금 대표하고 있는 이병훈 장로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장로님! 빨리 출발하세요. 빨리 의료진하고 빨리 복구인원들을 가지고 출발해서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도와 줘야 됩니다.” “아 지금 돈이 없는데요.” “내가 당회열 시간이 없어요. 장로들하고 의논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내가 결정을 하고 나중에 허가를 얻을것이니까 25만 달러를 인출해서 출발하세요.” 서남아에 재앙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우리 한국에서 구호단체로 가장 먼저 출발한 단체가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디오에서 본 것처럼 우리 선한사람들이 가서 그 열악한 가운데서 창고에 가마니를 깔아 놓고 모기에 물리면서 자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위생시설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을 수술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에 북한에 많은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옥수수 심기는 우리가 주로 힘을 들여서 북한 양식을 위해서 옥수수 심기를 하고 앞으로 이제 감자종자심기를 또 도와 달라고 해서 그것도 도와주려고 합니다. 북한에 결핵환자를 위해서 수십억을 보태 주었습니다. 이제는 또 북한에서 콩가루 공장을 세워 달라고 그래서 그것도 지금 우리가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라크에 난민들 우리 한국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우리 교회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나누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요단강물을 받아서 살아있는 갈릴리 호수같이 생명이 있는 이유는 우리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수없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3천명의 어린이들을 심장수술을 했지요. 우리가 5백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요. 4천여 농어촌 교역자들의 생활비를 돕고 있지요. 그래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해서 선전을 안하니까 사람들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뭘 하느냐? 큰 교회가 자기 욕심만 부리고 사느냐, 우리가 우리 욕심만 부리고 살았으면 지금 사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도움을 우리가 베풀고 협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될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옛날 아담 자손의 탐욕은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었기 때문에 섬기고, 나누는 것이 우리의 생존의 본연인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크리스챤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연을 보존하고 살아야 돼요. 자연도 우리와 함께 지구상에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동물이나 곤충들까지라도 우리 사람들과 같이 살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함께 살라고 지구에 주어서 그것들이 멸망당하면 우리도 죽는 것입니다. 동식물을 우리가 돌보고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과 22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탄식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 잘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 주인 잘못 만나서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남획하고 있습니다. 나무도 그냥 베어내고 하천도 썩이고 공장폐수를 흘려서 물고기가 다 죽게 하고 쓰레기를 버려서 땅을 오염시키고 너무나 자연을 짓밟았기 때문에 자연이 가만히 있지 않아요. 제가 어릴 때는 시골에서 벼농사를 지을 때 벼를 심고 난 다음 논두렁에 콩을 심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님이 늘 콩 심으러 갈 때 우리보고 말하기를 “콩을 심을 때 세알을 심어라”고 그래요. 여러분 긴 막대기를 가지고서 논두렁에 꽉 눌러 가지고서 콩 세알을 심습니다. 농촌에서 안 자란 사람은 잘 모르지요. 그 농촌에 살았다는 것이 상당히 많은 추억과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할머니 왜 꼭 세알을 심어야 됩니까?” 그러니까 “야~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세알을 심으라고 한 것은 한 알은 땅 밑에 있는 벌레들이 먹고 둘째 알은 짐승들이 먹고 셋째는 사람이 먹는다. 나누어 먹고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꼭 콩 세알을 심어라.” 그래서 제가 언제나 꽉 찍어서 “나누어 먹자. 들어가라!” 싹싹 밟고 또 꽉 찍고 세알 넣고 싹싹 밟고. 옛날 사람들은 안가르켜 줘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죽으면 우리 인류도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내가 놀라운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전라북도 어느 마을의 논은 다른 논에 비해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마을에 있는 다른 논의 수확은 그렇지 않았는데 유난히 그 논은 수확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논 주인을 찾아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제가 특별히 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매일 논의 벼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침에 논에 가면 벼들아 잘잤니? 잘잤지? 그리고 더운 날에는 야~ 많이 덥구나 얼마나 고생하니? 무덥지? 고맙다. 더위를 이겨 주어서 고맙다. 그와 같이 이야기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 벼보다 그분의 벼는 유별나게 자라고 수확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동물도 한 가지 아닙니까? 여러분 집에 가서 강아지를 발로 차 보십시오. 그러면 그 주인만 들어오면 개가 꼬리를 배속으로 집어넣고 귀를 낮추고 이렇게 보고서 구석으로 숨지 않습니까? 그러나 강아지를 “내 사랑한다. 아이고 너 귀엽다.” 좋다고 두들겨 주면 주인이 오면 막 뛰고 주인이 오기 전에 문을 깔깔깔 발길로 긁고 좋아합니다. 사랑은 동물도 식물도 생기를 주는 것입니다. 미움은 동물도 식물도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우리의 자연환경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자연환경이 분노를 한 것입니다. 지구상의 기상이변 보세요. 얼마 전 남아시아에서는 지진해일로 15만명 이상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실종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지구촌 곳곳에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북부에서는 계속된 폭우와 강풍으로 최소 16명이 사망했고 비행기 선박, 자동차등 대부분이 교통마비 되어 있습니다. 영국 북부 아일랜드에서는 40년만에 내린 최악의 폭우로 강이 범람하고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상떼베드로부르그는 역시 폭우로 인해 도시 일부가 물에 잠겼고 일부 지하철이 폐쇄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는 너무 더워서 그 추운 겨울이 지금 봄날같이 되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결코 눈이나 얼음이 어는 법이 없는데 5일째 계속된 폭설로 눈이 완전히 산을 덮고 또 폭우로 10일 현재 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브라질에서는 가뭄과 폭우가 한꺼번에 찾아와서 일부 지역에는 비상사태가 선포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겨울이 짧아지고 1월 중순이 접어든 오늘 아침에야 눈이 조금 왔습니다. 눈 없는 겨울입니다. 제가 1954년인가 5년인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얼마나 눈이 오는지 말도 못하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 눈이 없어요. 기상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눈이 안와요. 지난달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UN기후협약총회가 열렸는데 그곳에 참가한 기상전문가들은 이런 자연재해가 환경파괴에 따른 재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하도 환경을 미워하고 짓밟고 남획하고 포획하고 파괴를 가져왔기 때문에 자연이 분노한 것입니다. 자연의 분노는 무섭습니다. 오래 참다가 자연이 한번 분노하면 지진으로 해일로 폭우로 폭염으로 다가오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자연에게도 베풀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동시에 다 사랑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만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구원시키고 자연도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존하고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이기적인 탐욕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이용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성경에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주는 삶, 나누는 삶속에 행복과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계속 드리는 삶을 살 때 계속 복과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주리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크리스챤 여러분 우리는 탐욕의 옛 아담의 삶을 살지 말고 새 사람이 된 크리스챤으로써 섬기고 나누고 드리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옛사람 아담은 탐욕에 묶여서 언제나 갖고 더 갖고 빼앗고 더 빼앗으려고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로 불행하고 고통과 싸움과 전쟁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들은 옛사람을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예수의 사람, 그리스도가 인생을 살아주는 사람으로써 내 아버지 하나님 섬기는 사람, 나누는 사람, 함께 짐을 짊어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