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2004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

by 삶의언어 posted Jul 09, 2024 Views 55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Extra Form
오늘의 주제 하나님/하나님 나라
예배드린 날 2004-11-07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AzzTI-S_pA8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서론]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 이것이 오늘 제가 설교할 제목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가을은 낭만의 계절입니다.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고 산과 들은 아름답게 물들고 즐겁고 가슴이 설레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에게는 울긋불긋한 단풍도 떨어지는 낙엽도 쌀쌀한 바람도 다 마음에 허무와 슬픔을 자아냅니다. 자연의 변화 속에서 마치 자기의 인생의 낙조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이와 같은 질문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죽고 난 후 정말 저 세상이 있을까?’ ‘혹시 아무것도 없고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욥기 14장 1절로 2절에는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론]
1.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한번은 사두개교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도전을 했습니다.
“선생님! 모세는 말하기를 형제 중에 형이 장가가서 아들을 보지 못하고 후사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 형의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맏형이 장가를 들어서 후사를 두지 못하고 죽어서 둘째가 형수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었고 셋째가 또 형수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는데 나중에 일곱째가 형수에게 장가들었으나 역시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주님 부활의 날에 이 사람들이 다 한 여자하고 살았은즉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권세도 알지 못하는 도다. 부활의 날에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천사와 같이 되느니라.” 그리고 죽은 자에 관해서는 마가복음 12장 26절 27절에 주님 말씀하기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80세에 호렙산 기슭에 갔다가 희한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가시떨기에 불이 활활 타는데도 가시가 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야~ 그것 희한한 광경이다.’구경하러 곁에 가니까, 그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으라!” 놀래서 신발을 벗고 고개를 숙였는데 거기에서 하나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음성을 예수님이 인용하셨는데 우리 한국어보다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보면 시상이 더 뚜렷합니다. ‘I am the God of Ab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지금 하나님이시며, 너희 조상 이삭의 지금 하나님이시며, 너희 조상 야곱의 지금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용한 시상은 ‘I am’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입니다. ‘I was’가 아닙니다. ‘나는 과거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I shall be’ 즉 ‘내가 장차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I am’, ‘나는 지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석하시기를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은 무슨 말씀이냐면 하나님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고 지금 죽어서 요단강을 건너간 영적인 존재의 하나님도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지금도 살아있고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의 세계로 들어가도 지금 살아있다. 그러므로 없어지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너희들의 하나님, 지금 죽어서 영적세계로 들어간 그분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육체로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약 3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있고, 이삭도 지금 살아있고, 야곱도 지금 살아있고, 너도 지금 살아있고 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지 죽어서 없어지는 자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두개교인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사두개교인들은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주님은 분명하게 부활이 있으되, 부활한 그때는 시집가고, 장가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천사와 같고, 그리고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거한다. 육체로 살아도 또 육체를 벗고 난 다음 영적세계에 들어가서도 인간은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3백 년 전에 아브라함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는 살아있고 3백 년 전에 이삭이 아니요, 지금 내게 살아있고 3백 년 전에 야곱이 아니요, 지금 내게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들은 지금 내 앞에 살아있고 너도 지금 내 앞에 살아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 버리면 그 사람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로 있든지 육체를 벗었던지 하나님 앞에는 없어지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이 다 살아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변화산상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로 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행길에 높은 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서 기도하자 갑자기 변화되어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고 옷이 희게 바랜 옷 같았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거기에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 나타난 모세는 예수님보다 1천 4백 년 전에 요단강 저 건너편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분명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난 다음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장례 지내고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1천 4백 년 후에 변화산상에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율법을 대표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예수님 그 당시보다 9백 년 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분명히 불말과 불병거에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선지자를 대표해서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사실을 예수님께 고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없어지면 1천 4백년 전에 죽은 모세가 어떻게 나타나며 9백년 전에 불수레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말입니까?
사람은 육체로 살든 영으로 살든 항상 하나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육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이요, 영으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육체의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예수님 오시기 3천여년 전에 하나님과 3백 년 동안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대로 데려가셨습니다. 죽지 않고 육체로 그대로 데려갔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죽어서 가나 육체로써 살아서 가나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로 살은 사람도 사람이고 그대로 데려가나 육체의 장막집을 벗어버리고 속사람 영혼이 올라가나 똑같은 인격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도 안 죽고 올라갔습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야도 안 죽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타날 때는 죽어서 올라간 모세나 안 죽고 몸으로 그대로 올라간 엘리야나 똑같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몸을 입고 있으나 몸을 벗어버리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지 몸을 입고 있는 사람, 몸을 벗은 사람 그 과정에 불과하지 사람이 없어지거나 달라지기는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선생의 사생관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바울 사도의 사생관
바울은 그의 생애 속에 셋째 하늘에 올라간 체험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로 4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적기 전에 14년 전 셋째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셋째하늘에 올라갔는데 자기의 체험담을 말하기를 “내가 몸을 벗어서 영혼이 올라갔는지 몸통째로 올라갔는지 도저히 구별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몸으로 있는 사람이나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으로 있는 사람이나 구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성자 썬다싱이 입신해서 하늘에 올라가서 많은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당분간은 자기가 죽은 줄을 모르고 있더랍니다. 분명히 세상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는데 자기는 한숨 크게 자고 깨어났다고 생각하고 죽은 줄을 모르고 있더라. 당사자는 죽음을 모릅니다. 자기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난 다음 깨어난다고. 그러므로 삶은 연속성이 있지 단절되어 버리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선생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천국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몸을 통째 거느리고 올라갔는지 몸에서 영혼이 빠져 나가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두 번이나 연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나 영혼의 삶에 단절이 없다. 연속이 있다는 것을 여기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으로 사는 것과 영으로 사는 것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체험을 했기 때문에 바울은 확신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의 장막집이 있으나 이 집이 무너지고 이것을 떠나나 삶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 영광스러운 체험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에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죽는다는 것이 겁나니까, 사람들이 담대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담대한 사람은 몸을 떠나면 곧 주님과 같이 있는 것이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즉시로 예수님과 같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보십시오. 사는 것보다 오히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담대한 말인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소똥 밭에 뒹굴어도 세상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데 바울은 차라리 이 땅에서 애꿎게 붙어서 살려고 하는 것보다는 몸을 떠나는 것이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니 그게 더 좋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은 얼마나 팔자가 좋습니까? 죽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죽는 것이 겁나지 않으니 이 땅에 거하든지 이 땅에서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곡성 다니엘 금식 수양관 박영문 원장의 간증을 인터넷에서 발췌한 것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극도로 싫어하는 반기독인에다가 알콜중독자였는데 1985년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치소에서 풀려나와 보니 아내가 “이제 그만 살자!”며 이혼하자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내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아내를 부추긴 처가집 식구 여덟 명을 모두 다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 마지막 어머니만 한번 만나본 후 그는 처가에 가서 여덟 식구를 다 죽이려고 마음에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광주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서울로 올라갈 기차시간을 40분 정도 남겨놓고 있을 무렵 갑자기 그 귀에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봐라! 여봐라!” 깜짝 놀라서 누가 대문에 있는 줄 알고 뛰어나가 대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대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 안에 들어가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려고 담배를 끄집어냈는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졌습니다. 놀래서 문쪽을 바라보니까 영롱한 무지개가 문에 떴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흰옷 입은 분이 내려오시는데 그 뒤에 수레가 하나 같이 따라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레에 왼쪽에도 흰옷 입은 사람이 앉아있고 오른쪽에도 흰옷입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가운데 수레가 비었더랍니다. 빈수레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자기 영혼이 빠져나가서 그 빈수레에 앉더랍니다. 깜짝 놀랜 것은 자기는 여기 육체에 앉아있는데 또 자기가 빈수레에 앉아있습니다. 꼭 거울을 보는 것 같더니만 순식간에 그의 육체의 몸은 사라지고 빈수레에 그는 올라타고 그대로 천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수레가 달려서 천국에 들어가는데 길가에 그렇게 아름답고 기화여초 만발한 좋은 환경이더랍니다.
그리고 세계 만방에서 올라온 성도들이 모여서 즐거워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외삼촌이 예수를 잘 믿었는데 젊어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외삼촌을 만났어요. 30대 젊은이같이 건장하고 너무나 영광스럽고 활기찬 모습으로 즐겁게 마중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수레를 타고서 황금 길을 달려가는데 그 길가에 너무나 아름다운 집들이 즐비하게 있는데 이제 막 지은 것 같이 새로운 집이 아직 사람이 입주하지 않았어요. 전부자 입주자를 기다리고 있는 집들입니다. 성도들이 올라와서 그곳에 입주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집들이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널려 있더랍니다. 천국의 그 영광에 너무 도취해서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데 그 수레는 그 영광을 떠나서 그 다음 캄캄한 터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 나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시더니만 이제는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서 나를 죽이는가보다!’ 하고 놀랬는데, 그 터널을 들어가자 바로 지옥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에 내려가니까 6년 전에 세상을 뜬 아버님을 보았어요. 아버님은 공자왈, 맹자왈 하신 분으로 굉장히 엄해서 예수님의 예자만 말해도 불호령을 내리는 아버지인데 몸이 퉁퉁 부어서 병들어서 세상을 떴는데 지옥으로 가보니까 아버님이 온몸이 고무풍선같이 되었는데 무시무시한 머리가 삼각형이 된 뱀들이 아버지를 칭칭감고 끊임없이 물고 찢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아우성을 치는 아버지를 보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부르짖어도 아버지가 몰라보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큰 불화로가 있는데 무시무시한 불이 활활타는데 사람들은 거기에서 불길을 피하여 이곳으로 저곳으로 아우성치며 몰려다니고 또 어떤 곳에는 큰 수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수렁에 빠져 허덕이는데 이름도 모를 짐승 같은 것이 나와서 끊임없이 물고 찢고 갈기고 할퀴는 모습을 보고 몸서리치는 지옥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지옥의 모습에 놀라서 떨고 있는데 큰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것을 보았으니 믿겠느냐!” 그래서 “예 믿겠습니다.” 대답하자 그 음성이 다시 말하기를 “이곳에서 이 경험을 사람들에게 전하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머니가 옆에서 얼굴이 사색이 된 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천상경험을 수일 동안 한 것 같은데 불과 한 시간쯤 실제 시간은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네가 이상한 말을 하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죽는 줄 알고 혼이 나고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그 체험을 어머니에게 말하고 난 다음 어머니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박영문 원장도 사후세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그는 헌신하여 오늘 기도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장로이며 곡성에 위치한 다니엘 금식수양관의 원장으로서 사역하고 있다고 인터넷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사라진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영체가 육체를 옷 입고 살기 때문에 이 천막집이 무너지더라도 우리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든지 안 그러면 버림받아 지옥에 들어가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 선생은 이렇게 소원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로 23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바울은 늘 소원했습니다. “차라리 몸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땅에 있어야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에게 천국을 전도할 수 있으니 또 몸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필요하다. 두 사이에 끼어서 있어야 될지 가야 될지 어느 것을 선택해야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자기는 사는 것도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이니 죽는 것도 자기에게는 큰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로마에 갔을 때 사도 바울선생이 순교당한 곳에 가보았습니다. 그의 목을 벤 나무와 그 위에 목을 얹어놓고 도끼로 손목을 잘랐다는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성경이 기억났습니다. 사형집행관은 바울선생의 생명을 중지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바울선생은 “내가 육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할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는 소원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바울선생의 목이 떨어져서 텅텅텅 세 번 뛰었다고 하는데 뛴 자리마다 샘물이 솟아올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울은 생명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육의 생명에서 영원한 영혼의 생명으로 계속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죽음이 절망이 아니라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지막 죽을 때 그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로 8절에 그의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관제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제사드릴 때 짐승을 제단에 얹어 놓고 불을 태워서 하나님께 재물로 드릴 때 그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입니다. 나는 벌써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 위에 내 생명을 포도주를 부은 것처럼 이미 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떠날 기약이 다가왔다. 떠날 기약이란 배가 항구에서 뚜~우 소리를 내면서 항구를 떠나가는 것. 이처럼 나는 인생의 항구를 떠나갈 때가 왔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바울선생은 자기가 순교할 기한이 가까운 것을 알았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기대에 꽉 들어찼습니다. 내가 육신의 몸을 떠나 하나님과 같이 가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죄를 용서하시고 선물로 주신 의로움과 영광과 놀라운 평안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3. 사후의 세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여러분 사후의 세계는 예수님께서도 뚜렷이 가르쳤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 주님께서는 말씀하기를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자색 옷은 붉은 옷으로써 권세 있는 사람이 입은 것이고 베옷은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부자가 입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권세도 있고 돈도 많은 사람으로 쾌락주의자, 현세주의자, 권력자인 그 부자는 날로 영화롭게 호화롭게 주지육림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영원히 계속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그 대문에는 병들은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는데 너무 몸이 병들어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부자의 밥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았습니다. 개들도 와서 그를 핥아주고 개와 함께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부자는 호화찬란하게 살고 이 거지 나사로는 병들고 비참한 거지였지만 부자는 속사람이 텅텅 비었습니다. 현세밖에 없습니다.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현재에 가난하고 병들고 비참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내세를 믿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서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의 상여는 아름답고 찬란하게 꾸며졌으며 수많은 조객들이 따르고 만장이 바람에 휘날려서 묘지까지 가서 아름답게 장식한 묘지에 장례 지냈습니다.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서 불꽃 가운데서 번뇌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사로도 죽었는데 그를 거적에 둘둘 말아서 공동묘지에 던져 버렸으나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이 와서 그를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 안에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부에 들어간 부자가 불꽃 가운데 고통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니까 저 낙원에 아브라함의 품속에 나사로가 있는 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를 보내어서 손가락에 냉수 한 방울 떠서 내 혀를 서늘케 해주시옵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너무나 번뇌하나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얘 너는 세상에서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권력주의, 세속주의로 살고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없이 살아서 심은 대로 거두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민하고 있지 않느냐? 나사로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었으나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이 그 심령 속에 있지 않느냐? 그는 지금 천국에 와서 이렇게 아름답게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또 너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그 속에서 우리에게 오지도 못하고 우리가 너희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너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는 대합실인 음부에 있고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대합실인 낙원에 와있다.”
“그러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주소서. 저 세상에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도 나 있는 곳에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가서 경고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니야! 세상에는 모세의 글도 있고 선지자의 글이 있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도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나 증거를 해도 그 말을 믿지 아니할 것이다.” 마지막 그의 기도와 소원도 거부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사후의 세계에 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세속주의자와 영원한 삶을 믿는 자의 차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없어지고 사라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로 16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 안에서 잠든 사람도 세상에는 잠들었지만 천국에서는 깨어있어서 주님과 함께 있다가 오실 때에 데리고 오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천국에 없는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옵니까? 천국에서 데리고 올 날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성도들을 주님이 강림하실 때 데리고 오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먼저 앞서 갔으면 지금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4절에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수많은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이 그날에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주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부활의 몸을 얻고 살아남은 우리들이 변화되어 구름 속으로 끌려 올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마가복음 9장 48절로 49절같이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 구더기 같은 죄책이 마음에 꿈틀거리며 파먹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끝없이 끝없이 죄책으로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책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불길가운데서 영원히 고민한다. 그들의 상황은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나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어릴 때 기억이 납니다.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었을 때 농부들은 벼논에 가서 통발을 대고 미꾸라지를 잡습니다. 아주 미꾸라지가 살이 쪄서 누렇고 굵직굵직합니다. 그런데 미꾸라지를 잔뜩 잡아서 소쿠리에 이렇게 부어서 소쿠리에 미꾸라지가 가득한데 우리 어머니가 미꾸라지 요리하는 것을 보니까 호박잎을 몇 개 따서 손에 잡고 미꾸라지를 싹싹싹 밀어 버려요. 호박이 거칠거칠하니까 미꾸라지의 끈적끈적 한 것이 다 벗어지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소금을 확 부어 버리니까 미꾸라지가 막 뛰는 것입니다. 호박잎으로 껍데기가 벗겨진데 소금을 쳐놓으니까 얼마나 팔딱팔딱 뜁니까? 저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때 그 미꾸라지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이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할진대 차라리 구원받지 못할 바에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은 다행히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행복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미국의 복음전도자 디엘 무디 선생은 죽기 직전에 천국에 갔다 오는 체험을 했습니다. 1899년 12월 22일 금요일 아침 무디는 아들 윌을 바라보며 “윌아 이것은 꿈이 아니다.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렵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라고 말한 후에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아들, 딸들이 울고 아버지 아버지 하니까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날 더 이 세상에 잡아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기를 보아라. 나를 데리러 오기 위하여 방안에 마차가 와 있구나.” 그리고는 환한 미소를 띄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그 아들 윌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의 예비한 수레타고 예비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육으로 살 때는 눈에 안 보이게 계시는 예수님이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 버리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서 우리 손 잡고 수레 태워 영원한 고향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너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름답고 황홀한 천국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사후의 영생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마리아의 몸을 통해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사람으로 사시다가 사람들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어서 장사된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사람으로서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으니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모범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로 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므로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되어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천당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을진대 우리는 죽음을 이미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하고 부활과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세계 3대 과학자로 인정받은 마이클 페러디는 말년에 한 사람이 찾아와 선생님의 영혼은 어떻게 되리라고 추측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페러디는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활을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예수님의 공로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추측이 아닙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그는 확신 있는 말을 과학자로써 했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진 역사적 확실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여러 해 동안 역사적인 기록과 유물들을 고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진실성을 조사했다. 사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풀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조사결과 놀랍게도 인류역사상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확실한 사실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표적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을 대표하여 죽으시고 사람을 대표하여 부활하셔서 사람을 대표하여 천당에 올라가신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 모두 다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조용기의 하나님이요, 여러분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요,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요,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계신 우리들의 하나님도 되시고 육신을 벗어버리고 천국에 가 있는 영혼들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오늘 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저와 함께 동업한 최자실 목사님도 살아있습니다. 저는 육으로 살아있고 그는 영으로 살아있습니다. 나는 육으로써 하나님 앞에 있고 그는 영으로써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어지는 자가 한 사람도 없고 죽은 자가 한 사람도 없고 육으로 살든지 영으로 살든지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선생같이 우리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 극복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겨 버렸습니다.
제3자가 볼 때는 우리가 죽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죽음이 없습니다. 육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지고 떨어진 단풍이 바람에 휘날려 갈 때 우리의 마음속은 “야~ 인생이란 저렇게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마는구나!” 쓸쓸한 생각이 날것입니다만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부활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인 것을 알고 감사하고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소슬한 가을이 다가와서 낙엽이 지고 설한북풍이 불어오더라도 우리 인생의 가을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다 이기고 부활과 영생이 주어졌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소망과 기도로 꽉 들어찬 삶을 살다가 육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을 짓지 않는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오.
육으로 살 때도 우리 하나님으로 돌보아 주시고 육을 벗고 영으로 살 때도 항상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