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by 삶의언어 posted Jul 10, 2024 Views 3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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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절기
예배드린 날 2004-11-21
오늘의 성구 시편 50장 22절로 23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z_7M_E4hlck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서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왜 나는 감사해야 하나?”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의 결과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감사할 때 마음이 기쁘고 행복해 집니다. 불행하면 마음이 슬퍼지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게 유익되고 좋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요. 물론 유익 되어도 감사 안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게 손해가 되고 나쁠 때 고통스럽고 슬플 때 감사드리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고 능력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반란사건 때 사범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이 학교에서 전도했다고 공산당 친구에 의해 총살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극히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첫째, 두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려고 했는데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감사하고 둘째는 한 아들이 순교해도 감사한데 두 아들을 다 하나님께 순교의 재물로 드리는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할 수 없는 처지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죽인 범인을 나중에 양아들로 삼아서 목사까지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사할 것을 찾으면 얼마든지 감사한 일이 있지만, 원망, 불평할 것을 찾으면 또 태산같이 원망과 불평할 일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외식하는 신자는 위급할 때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그 위험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는 감사할 줄 모른다. 이는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극작가 돈키호테를 지은 세르반테스는 ‘인간이 범하는 가장 큰 죄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 지옥은 배은망덕한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죠는 ‘아무리 이해심이 많고 열심히 뛰어난 행동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 향한 높은 감사가 없다면 생명있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작 왓톤은 ‘하나님은 두 개의 거처가 있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우리가 감사해야 되나요?

[본론]
1.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감사드림
첫째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제일 감사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사람이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한때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고 때는 지나가고 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종말이 다가올 때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린 것은 다 과거의 일이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꿈에 한 상 잘 차려 먹어도 깨어나고 난 다음에는 여전히 배가 고픈 것과 한 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는 것은 더 큰 허망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기업가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국, 항공회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 업체를 가진 굉장한 부호로 젊은 시절에 할리우드 영화배우들과 수많은 염문을 뿌리기도 했는데 그는 45세 때부터 대인기피증에 걸려서 사람들과 대면하지 않고 혼자서 살았습니다.
집에도 무균실을 만들어 놓고 병균을 두려워해서 무균실에서 살고 음식도 독이 들었을까 싶어서 치킨 스프만 먹고서 살았습니다. 이발사가 혹시 면도나 가위로써 자기를 찔러 죽일까 겁이 나서 이발도 안하므로 머리가 여자머리같이 길게 내려오고 손톱과 발톱이 매 손톱과 발톱처럼 길었습니다. 그는 계열사 사장하고도 직접 만나 이야기하지 않고 전화로 말하거나 마이크로 지시를 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영양실조가 걸려서 나중에는 비행기 타고 여행하다가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nothing! nothing! nothing!” 즉 “헛되고, 헛되고, 헛되구나!”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큰 부자가 죽을 때 한 탄식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구나!” 아무런 재산하나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너무나 어둡고 캄캄한 지옥을 향해서 그는 들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노벨상을 수상했던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62세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허무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귀, 영화, 공명, 명예 다 있었습니다. 결혼도 여러 번 했다가 이혼하고 또 결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냥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서 자살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하나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부귀, 영화, 공명이 자기 목숨을 구해줍니까? 허무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감사해야 될 것은 우리는 비록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못 가졌다 할지라도 가장 귀한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우리는 끝없이 끝없이 감사해야 됩니다. 또 우리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합니다. 여러분 옛날에 태어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더라면 믿을 수도 있는데 그들에게는 복음이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믿고 죽어서 지옥에 간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0절로 21절에도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나라에도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만 해도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1784년 이성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때부터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1886년까지 약 100년 동안에 우리나라에 무려 예수 믿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이 1만 명에 달합니다. 또한 40년 간 일제치하와 6.25사변을 통해서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일제치하에서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목사나 장로, 평신도들이 얼마나 구박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순교를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해방이 나흘만 늦었더라면 우리 한국에 기독교 교인 20만 명이 학살되었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은 1945년 8월 17일 날 대학살을 계획하고 살생부를 만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 20만 명을 처형할 계획을 세워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나흘 앞서서 1945년 8월 15일 날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져서 그들이 항복했기 때문에 2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안 죽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무서운 시대를 지냈었습니까? 6.25사변 때도 예수 믿는다고 공산당들에게 교회가 불타고 총검에 찔려서 죽은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는 정말로 평화롭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천당갈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핍박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안 믿을 수는 없고 믿자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한국같이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나라에 사니 감사합니다.
시편 33편 12절에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자유의 하늘도 자유의 땅도 없는 그러한 곳에서 예수 믿으려고 하다가 수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어느 곳에 가도 자유로이 예배드릴 수 있고 교회 세울 수 있고 전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니 참 좋은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국민들이 지금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무질서하니까 불평, 원망, 많이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자유국가인 것입니다.
자유의 하늘나라에 자유의 땅에서 마음껏 마음대로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교회 짓고 전도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국제 오픈도어선교회가 2004년 1월 발표한 종교자유박해국가의 순위를 보면 북한은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가로 2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양에 전시용 교회를 두 개 세워 놓았지만 진짜 기독교인이 발견되면 즉시로 투옥하거나 처형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북한에 추정컨대 한 40만 기독교인이 있는데 이들은 다 지하에 숨어서 남몰래 하나님을 예배하고 혹은 한국에서 전하는 극동방송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믿어야 되는 것이므로 거기에 비교하면 우리가 얼마나 좋은 나라에 살고 있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약 2억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고 4억 정도의 신자들은 상당한 처벌을 당하고 있습니다. 박해국가 2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에는 국교인 회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으면 즉시로 사형에 처합니다. 그리고 외국인들도 예배드리다가 잡히면 강제추방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얼마나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전도합니까? 우리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을 공짜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너무 감사하고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민국 만세를 늘 불러야 할 것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감사해야 될 것은 좋아하는 교회가 있으니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인데 여기에 와서 우리가 영적 양식을 먹습니다. 우리 집이 있는 것 얼마나 좋아요. 우리 집이 있으니 가족들이 모여서 살고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는 영적인 집이요,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곳입니다.
제가 세계 여러 곳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에 잘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좋은 한국 음식점을 발견하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일입니다. 좋은 음식점이 있으면 점심, 저녁을 그곳에서 잘 먹으면 몸에 건강을 유지하고 설교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한국 음식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빨리 그 도시를 떠나고 싶습니다. 잘 먹지 못하니까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 굉장히 좋지요. 영적으로 내 마음에 맞는 교회를 발견하고 내 마음에 맞는 영적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교인이 된다는 것 굉장히 축복된 일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한 교회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떠돌이 교인들이 많아요.
2003년 교회성장연구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신교인의 76.5%가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고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인 6명중 1명이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매일같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58.4%가 예전에는 기독교를 믿었는데 마음에 맞지 않아서, 좋은 교회를 발견하지 못해서 종교를 바꾸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 현재에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과거에 종교를 가졌다고 응답한 사람들 중 73%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은 교회를 발견하지 못하고, 영적인 꼴을 받지 못해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 1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신앙을 버리거나 혹은 타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에 맞는 좋은 교회,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를 발견했다는 것 굉장히 감사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천국 갈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찾은 것을 감사드림
둘째로, 우리가 감사해야 될 것은 나를 찾았으니 감사해야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는 나를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입니다.
“당신 누구요?”, “몰라요”
“어디서 왔소?”, “몰라요”
“왜 살아요?”, “몰라요”
“어디를 가요?”, “죽으면 그뿐이지 몰라요.” 정체불명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체불명의 사람, 길 잃어버린 사람,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에 안정이 없고 평안이 없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우리의 정체성이 확립된 잃어버린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 누구요?”, “하나님의 자녀요.”
“어디서 왔소?”, “죄악가운데서 떨어졌으나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소.”
“왜 사오?”, “하나님 섬기고 영광돌리기 위해서 사오.”
“어디로 가오?”, “천당으로 가오”
분명하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정체성을 확립했으므로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 명함이 없는 상실감을 맛본다고 합니다. 퇴직을 하고 나면은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누구라고 소개할 때 명함을 내놓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어떻게 압니까? 명함을 보고 ‘아~ 이 사람 삼성회사에 나가는구나! LG에 나가는구나! 아 이 사람은 SK에 나가는구나’ 이렇게 알고 그 직위를 알고 대접을 합니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나면은 명함이 없으니 정체성 상실입니다. 다 상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있을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공중에 떠버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김영진 박사는 이 상실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의 자긍심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어느 직장이나 분야에 소속됨으로써 자연히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후광의 효과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면 위상이 달라진다. 명함을 내밀 일도 없고,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회사 앞 술집에서 외상술 먹을 입장도 안 될 때 상실감을 느낍니다. 자기는 잃어버린 존재구나! 버림받은 존재구나!
월간조선 2002년 5월호에 재벌 개열사 대표이사였다가 퇴직한 한 사람이 인터뷰한 내용이 있는데 “기자가 퇴직 후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문제점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주고받던 명함을 내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변화인지 모릅니다. 무심결에 사람을 만나서 자기소개하려고 포켓에 명함을 찾아보니 명함이 없습니다. 아~ 내가 정말 회사를 그만두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오면 마음속에 버림받은 심정 소외받은 심정, 허무감이 물결치듯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상실을 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부들이 사십 대 이후에 방황하는 것은 젊을 때는 남편 섬기며 자식 기른다고 정신없이 지내다가 이제는 남편은 사회 출세해서 사회에 바쁘고 자식들은 다 커서 나가고 나면 홀로 남습니다. 그 때에 상실감을 느낍니다. “나는 뭐냐! 지금까지 남편 섬기고 자식 위해서 희생하고 살았는데 이제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은 다 떠나가고 나는 무엇이냐!” 묻게 됩니다. 거기에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버림받은 심정,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를 믿게 되면 십자가 대속으로 새로 피조된 자아를 발견하기 때문에 정체성 위기에 처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죄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과 평안을 받은 사랑받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냐! 나는 죄와 마귀에서 벗어나고 거룩함과 성령충만 받은 사람이다.”
“나는 누구냐!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치료함을 받고 건강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누구냐! 그리스도께서 나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누구냐!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심으로 나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받은 사람이다.” 자기에 대한 분명한 주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상사들이 밤에 자는데 옆구리를 탁 차면서 깨워보니까,
“네가 누구냐?” 묻습니다. “조용기입니다” 하다가는 당장 한 대 얻어맞습니다.
“예, 10822398입니다.” 자기 군번을 말해야 돼요. 군번을. 얼마나 밤낮으로 군번을 외웠던지 그때가 언제입니까? 20대인데 지금 70이 다되어도 그 군번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10822398. 여러분 그것이 자기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너는 누구냐?”, “십자가를 통하여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요, 나는 성령받은 사람이요, 치료받은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요,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이다.”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된 자기 정체감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인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 심판하는 하나님, 채찍을 때리는 하나님으로만 알았다면 움츠리고 우리는 부정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끝까지 참으시고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
우리는 아담의 후예로서 3대 재앙 속에 살았습니다. 죄와 영혼의 죽음, 저주와 육신의 가난함, 육체의 질병과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멸망, 이런 3대 재앙에서 허우적거리고 몸서리치는 우리를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사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저주를 철폐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부활을 통하여 영생복락을 얻게 한 삼중축복을 주셨습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서 전인구원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중복음의 옷을 입고 삼중축복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당당하게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인생을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런 일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을 때 남에게 맡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맡길 수가 없이 내가 짐을 지고 홀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짐이 무겁고 괴롭습니까?
옛 시인도 ‘여보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늙기도 서러워라하거든 짐을 지실까.’
짐을 짊어지고 남에게 맡길 수 없으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짐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들 다 내게로 와서 내게 맡겨라. 내가 쉬게 하겠다. 내가 너희 짐을 짊어지고 내가 너희 일을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짐을 맡기고 내 일을 부탁하고 맡기고 주님 품에 기대어서 쉴 수 있는 인생이 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한강을 어떻게 건너갑니까? 못 건너가지요. 그러나 주님께 업히면 주님이 우리 업고 한강 건너가시는 것입니다. 고비사막이나 사하라사막을 우리가 어떻게 지나갑니까? 사막같은 인생을 어떻게 지나갑니까? 주님께 안기면 주님이 우리를 안고 사하라 사막이나 고비사막같은 인생을 지나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으며,
신명기 1장 31절에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따라 말씀하세요. ‘주님은 나를 업으시고 강을 건너시고 나를 안고 산을 지나가신다.’
그러니 주님께 의지하면 어떤 강이 나를 가로막아도 주님께 업혀있고, 어떤 인생사막이 다가와도 주님이 나를 안고 건너가 주실 것이니, 예수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권세 자들이나 능력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아무 피조물이 와서 우리를 공격해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님이 나를 업어주시고 안아 주셔서 강을 건너고 사막을 건너가시니 내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우리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모에게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고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우리 속을 다 털어놓고 마음 문을 열어놓고 거기에 보태어서 나를 들어 주시고 도와줄 수 있으면 더 좋잖습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는 우리 마음을 다 털어 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맡길 수 있다는 것 감사하지요. 아무에게도 내 사정을 말할 수 없고 내 짐을 맡길 수 없다면 나는 외롭고 고독하고 버림받은 심정 아닙니까?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일을 행하시는 야웨,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야웨, 그 이름을 야웨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겠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알고 계십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하고 맡기고 살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림
셋째로, 우리가 감사할 것은 천국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예수님을 믿을 때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하나님의 아들나라로 우리를 옮겨 주셨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율법의 심판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율법 앞에 의로운 행위를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법은 죄를 잡는 것입니다. 법 앞에 서서 해방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율법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충당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율법은 철폐되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율법의 심판과 정죄에서 해방을 받고 이제는 자유롭게 주님을 감사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며 천당갈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율법의 정죄와 심판과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를 죽이라고 하나, 예수님은 ‘내가 맡았다. 내 안에서 너는 용서받았다.’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받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니,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까?
인간의 행위의 자랑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선한 일을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선한 일을 행해야 됩니까?
나는 옛날 우리 할머님이 불교 믿을 때 우리 할머님께서 늘 선을 행해야 나중에 극락에 간다고 그래서 늘 고민을 하십니다. 뭐냐면 낮에 농촌에서 일하기 때문에 밭을 매면서 굼벵이를 죽입니다. 굼벵이가 나올 때마다 죽입니다. 살생을 했답니다. 할머니가 늘 걱정하기를 “나는 오늘 굼벵이를 수십 마리 죽였다. 이렇게 살생을 하고도 나는 극락에 갈수 있겠는가! 그 굼벵이가 우리 조상인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런 고민을 늘 하고 있어요. 그때 그 고민은 우리 할머니에게는 절실했습니다. 왜 인간 행위로써 구원받는다면 여러분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인간행위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데 간증을 주도하는 사람이 상당히 율법적이었습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그러한 은근한 율법주의자였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간증을 했어요. “나는 예수를 믿고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 영광으로 지음으로 받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충성하고 하나님 자녀가 되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 예배드릴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감사하다”고 앉으니까, “아니 성도!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당신이 그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좀 했을 것 아니요?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신 것 아니요?” 하니까, “아 참! 내가 잊어 버렸습니다. 내가요, 예수 믿기 전까지 못된 일은 다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다했어요. 아주 망나니짓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은 죄밖에 없는데 주님이 자비와 긍휼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64장 6절에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더러운 옷 같습니다.
로마서 3장 27절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남녀, 노유, 빈부, 귀천할 것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서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어 놓았는데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주님 다 이루어 놓으시니 우리는 공짜로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우리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난 자도 선물을 받고 못난 자도 선물을 받습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 없이 선물을 주는 것은 그냥 선물로 받는 것이지 돈 주고 행위로써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예수를 선물로 받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예수로 말미암아서 밖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은 우리 인생에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니라. 우리 공로로 하늘나라 갈 거라면 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천국에 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공짜로 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와 의로움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다가 일어나서도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최후의 소망은 천국 아닙니까?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 주님이 머리맡에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겠다. 주님이 황금수레 가지고 와서 우리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날 때 손잡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겠다고 하셨으니 안심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저 광막한 죽음의 길을 나 혼자 성큼 한 발자국 내딛는다면 그 어둡고 캄캄한 좌절과 절망의 길을 어떻게 가겠습니까? 예수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재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주님이 데리러 오시기 때문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로 4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어느 목사님이 주일 설교를 마친 후에 다음 주일에 천국에 대한 설교를 하겠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중에 목사님은 그 교회 다니시는 한 노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55년 전에 아무 값없이 천국에 있는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 땅을 주신 분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루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훌륭한 건축가라서 제집을 멋지게 지어 주셨습니다. 그 집은 개조나 수리가 필요 없는 영원한 집입니다. 화재나 홍수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도적이 없기 때문에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아도 됩니다. 또 내 집이니까 전셋집도 아니고 월세집도 아니니 쫓겨날 걱정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과 천국 사이에는 원래 죽음이라는 깊은 어두움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오래전에 그분이 그 어두움을 다 몰아내고 부활의 광명한 등불을 켜놓으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천국에 대한 생각만 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제 몸이 너무 약해서 다음 주일 천국에 대한 설교를 듣기 전에 이 땅을 떠날 것 같습니다. 혹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에 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 바랍니다.”
죽음을 앞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죽음의 그 길을 안내하시는 안내자로서 우리 머리맡에 다가오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천국 내 천국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는 이 은총을 받았으니 우리는 늘 이로 말미암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공통적으로 감사할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감사는 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원망과 불평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마귀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면 할수록 더욱 감사한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마르틴 바덴의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원래 자유주의 사상을 지녔던 사람인데 젊은 시절 집권세력인 극보수파에 밀려나는 바람에 무척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한번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 하룻밤을 묵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도둑이 와서 신발을 훔쳐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는 도둑에게 있는 욕, 없는 욕 다 퍼붓고 난 다음에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나처럼 가난한 사람의 구두를 훔쳐가는 것을 뻔히 바라보시면서 그대로 내버려 놓았단 말인가!” 자기가 구두 간수 잘못해 놓고 난 다음에 구두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원망까지 했습니다.
마침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여관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티를 달래며 그러지 말고 함께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신고 간단 말입니까? 이 눈 위에 맨발 벗고 내가 어떻게 교회가요?” 그래서 여관집 주인이 창고에서 허름한 구두 한 켤레를 가지고 나와서 “이것 신고 갑시다.” 그 간청에 못 이겨서 신발이 맞지 않는데도 허름한 신발을 신고 함께 교회를 갔는데 참 희안하게도 자기가 앉는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느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다리가 없는 그 사람 옆에 자기가 와서 앉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기도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저를 돌보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이 삭막한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다리가 없어도 이렇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해주시니 감사하고 또 다리가 없으니까 신발 살 걱정도 안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말이 가슴에 탁 부딪혔습니다. 자기 보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마르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없어도 이렇게 감사하는데 나는 두 다리가 멀쩡한데도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구두 훔친 사람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두 다리가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분은 두 다리가 없는데도 감사하는데 나는 두 다리가 있으니 얼마나 더 감사합니까? 신발 잃은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낡은 신 너무 오래 신으니까 새신을 바꾸어 신으라고 낡은 신을 없애 주시니 감사합니다. 없애주신 하나님은 새신을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 마르틴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점차 변화되었고 마침내 독일의 재무장관으로서 국가에 크게 봉사하며 국민에게 존경받는 정치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구두를 감사했는데 그의 온 생애가 변화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적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삶을 살 때 우리 인생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원망, 불평, 탄식하면 있는 것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유명한 영국의 목사였던 스펄젼은 말하기를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태양을 주시고 태양을 보고 감사하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태양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촛불을 가지고 불평을 하면 다 잃어버립니다. 태양빛 아래서 감사하지 아니하면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보고 감사하겠습니까? 예수님 믿게 된 것을 제일 감사해야 되고 잃어버린 나를 찾았으니 너무너무 감사해야 되고 우리의 삶 속에 천국 소망이 있으니 우리는 너무나 감사해야 됩니다.


[결론]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에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니 이 토대위에 서서 좋은 것은 좋아서 감사하고 좋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현재에 우리 환경을 보고 불평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감사하십시다. 나의 짐을 지시고 나의 일을 해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두 손을 활짝 펴고 ‘자 내게 업혀라. 강을 건너 주마. 내게 안겨라. 사막을 내가 지나가게 해 주마.’ 하시는 그 주님과 함께 사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야로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실 우리는 너무나 불평하고 살았습니다.
내게 있는 것 감사하지 않고 없는 것 바라보고 늘 원망, 불평, 탄식한 죄를 회개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마르티처럼 신발 잃은 것 오히려 감사했으면 하나님 좋은 신발 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잃어버린 것 불평하지 말고 주실 것 생각하고 감사하는 우리들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없는 것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