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위로

by 삶의언어 posted Sep 15, 2024 Views 6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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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소망/위로
예배드린 날 2014-06-22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1장 3절로 1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JWP_gXy5mqs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중략)…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장 3∼11절

 

낙심한 자들 위로하시는 참 좋으신 우리 하나님
전심을 다한 사랑의 위로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
성령과 말씀으로 고난 이기는 ‘참된 위로’ 얻어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2014년 국내 10대 트렌드’ 중에 하나가 ‘위로가 필요한 사회’라고 합니다. 고용이나 주거, 노후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면서 힐링이나 멘토, 상담과 같이 불안을 달래주는 ‘위로 산업’이 발달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런 유행을 반영하듯 실제로 길거리에서 외롭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프리 허그(Free Hugs)’ 즉 “공짜로 안아드립니다”라는 행사가 열리기도 합니다. 외롭고 괴로울 때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것은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도리도리 인형’도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우면 이런 것들이 유행일까요?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필요로 하지만 정작 위로를 얻을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궂은 일을 당하면 발 벗고 나서 도와주고 해결해 주는 미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상처와 불신이 가득해 위로를 주고받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향해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야 됩니다.

 

 1. 예수님과 위로

 예수님도 이 땅에 사실 동안에 위로가 필요하셨을까요?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상처를 입었으며 인간을 위한 십자가 고난을 당할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 잔을 옮겨주소서”라고 기도하시며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순수한 사람으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결정적인 위로를 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베다니의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옥합을 품에 품고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여인들이 시집갈 때 지참물로 옥합에 향유를 채워 가져갑니다. 옥합이 크고 향유의 질이 좋으면 시집갈 때 대단히 환영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고급 향유로 가득 채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와서 ‘탁’하고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을 위해 다 부어버렸습니다. 시집을 가기 위한 귀한 지참물인 향유를 다 부어버렸으니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부어 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칼을 펼쳐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고함을 치며 이 여자를 비난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4절로 5절은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고 기록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한 명의 노동자가 1년 동안 먹지도 쓰지도 않고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때 가만히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변호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절로 8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통해 보여준 자신에 대한 감사와 흠모의 정을 느낀 것이 굉장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데 이 이름 모를 여인이 와서 그를 사랑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대단히 마음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위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를 꾸짖는 자를 주님께서 크게 꾸짖고 그녀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낭비는 허랑방탕한 낭비도 있거니와 이처럼 주님을 위한 거룩한 낭비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낭비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이 여인은 거룩한 낭비를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녀에게 엄청난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이뤄져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도 이 여자가 한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가 필요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셔야 십자가를 걸머집니다. 큰 고난은 위로가 없이는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크고 작은 고난을 많이 당하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해주면 쉽게 이기고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가 없으면 견뎌내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한 여인의 신실하고 전심을 다한 사랑의 위로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위로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2. 사도 바울과 위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도들 중에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도 자신의 삶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아  수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참기 어려운 고난이라도 성령님의 위로가 임하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심한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난 다메섹의 체험과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을 들었던 체험의 특별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마음에 오래오래 남아 위로가 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마음에 계셔서 오래오래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됩니다. 우리 인생의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장 8절에서 10절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기록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바울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것이 마음에 있어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오’는 ‘위로’라는 뜻입니다. ‘파라’라는 것은 ‘곁에서’라는 뜻이고 ‘클레오’라는 것은 ‘와서 도와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가 되시고 똑같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이 분은 ‘파라클레이토스’로서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초대 교회 때 억센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줄기차게 복음이 증거 된 것은 성령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감옥에 끌려가도 감사하고 기도하고 못 먹어도 극복하고 얻어맞아도 극복하고 죽음의 위협에도 극복합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위로가 ‘꽉’ 들어차서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성령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큰 기적을 행합니다. 성령은 바로 ‘위로의 영’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위로해 주는 영입니다. 그 위로가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수가 많아지는 것은 성령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나눠주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수가 많아지게 됩니다. 누구든지 위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로 7절은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고난에 참여하면 하나님께서 고난과 동등한 위로도 허락해 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위로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합니다. 고난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고난이 있으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가 다가옵니다. 고난의 쓴물이 다가오면 위로의 단물도 다가옵니다. 고난의 슬픔이 다가오면 위로의 기쁨도 다가옵니다. 진정한 위로는 성령과 말씀을 통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위로가 되고 말씀을 공부할 때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동안에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위로 없이는 고난을 견디고 이겨나갈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대결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의 목을 베겠다고 엄포를 놓자 피곤하고 지친 엘리야에게도 두려움이 찾아와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가득 차서 그 길로 일어나서 유다 땅 브엘세바로 하룻길을 걸어서 사막의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신세를 한탄하며 차라리 죽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가 물 한 병과 떡을 가지고 와 떡을 먹여주고 그 다음에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루만져 주며 잠을 자게 했습니다. 깨어나면 또 물과 떡을 주고 다시 잠을 재웠습니다. 그렇게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주자 엘리야는 회복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베풀기 위해 호렙산으로 가는데 그 먼 길을 걸어가도 피곤치 않았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낙심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위로를 받아야 됩니다. 우리는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엘리야를 위로해 주셨던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모두를 위로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3. 서로 위로하라

 이사야 40장 1절은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12장 15절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기록합니다. 즐거워하는 잔치 집에 가서 ‘엉엉’ 울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같이 웃어주고 기뻐해줘야 합니다. 또한 초상집에 가서 ‘하하’ 웃으며 박장대소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아주 고약한 짓입니다. 함께 슬퍼하고 울어줘야 합니다. 분위기를 따라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어 주어야 서로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비난과 공격의 말로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줍니다. 잠언 12장 18절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고 기록합니다. 말을 칼로 찌르는 것같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면 앉자마자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고 과거에 잘못한 것을 말하여 고통을 줍니다. 정말 괴롭습니다. 이혼하는 부부들도 칼로 찌르는 말을 주고받으며 아프게 하고 무례하게 굽니다. 서로 그런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서로 미움이 들어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17장 9절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이해와 칭찬과 동정으로 위로하기에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랑을 베풀고 이해를 베풀며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데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누구든지 위로를 받아야 위기의 순간에도 전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위로받으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누구든지 자꾸 비난을 받고 공격을 받아 약점을 잡히면 낙심하고 뒤로 넘어집니다. 위로를 받아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은 바로 두 사람 이상 있으면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굉장한 힘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충만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위로해 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하는 것은 자꾸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못하는 것은 지적하고 싶으면 딱 한 번만 말하고 다시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장점을 말하고 단점은 덮어주는 것이 위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방언을 통해 기도해 주시고 함께 간구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위한 교훈도 되지만 실제로 이것은 약이 되고 치료가 되고 양식이 되고 도움이 됩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가 생겼으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약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 고백을 통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공부하면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글이 아닙니다. 소설책이 아닙니다. 시집도 아닙니다. 성경은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치료제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자유케하고 해방하는 치료제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신 것을 꿈꾸고 믿고 입술로 말하면 정말로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한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생각하고 많이 외우고 입으로 시인하면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기적이 꼭 나타나게 됩니다.

 시편 119편 50절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기록합니다. 고난 당할 때 주님의 말씀은 위로가 돼 우리의 마음에 힘을 주고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날 버려도 내가 말씀을 가지고서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그 말씀이 큰 위로와 생명이 돼 나로 하여금 패배하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고난만 당하면 희망을 잃게 됩니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위로받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하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용서받아 거룩케 되는 위로가 되고 병든 자에게는 고침의 위로가 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면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주는 위로가 되고 죽음 앞에서는 부활과 영생 천국의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참된 위로의 십자가입니다.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입으로 외워 위로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생기와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로를 통해 이 세상 고난을 이기고 살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낙심한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의 은혜를 주신이가 성부 하나님이요 성자 예수님이요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므로 두고 보십시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훨씬 좋아지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항상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어디에서도 아주 작은 위로조차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한 여인의 헌신적인 위로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었듯이 사도 바울이 성령님의 위로를 통해 모진 고난을 이겼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위로 받고 힘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위로만이 우리에게 참된 힘이 됩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