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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허망이냐, 희망이냐

by 삶의언어 posted Apr 27, 2024 Views 1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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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그리스도인
예배드린 날 2014-05-04
오늘의 성구 전도서 1장 1절로 1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1QOeeWd5EV8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중략)…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서 1장 1∼11절

 

허망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한 희망
항상 희망의 복음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바꿔 주셔

 희망을 잃고 허망의 수렁에 빠진 사람은 절망으로 헤매다 자살하든지 혹은 살았다고는 하지만 죽은 자처럼 되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의 가슴에서 희망을 빼앗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먼저 희망을 빼앗아야 그 다음 파멸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십니다. 허망이란 시들은 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쫓다가 이것저것 다 놓쳐 버리고 허공만 바라보고 탄식하며 허망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희망은 활짝 핀 장미꽃 같이 우리 마음을 밝히고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1. 우리 앞에 열려 있는 두 개의 문
 

 우리가 태어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우리 앞에 두 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허망의 문과 희망의 문입니다. 허망의 문은 아담이 상속해준 슬픔의 문입니다. 허망의 문은 죄와 허물의 문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일을 행하며 허망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또한 그 문은 질병과 고통의 문이며 절망과 굶주림의 문입니다. 병들어 고통 받고 절망과 굶주림의 문을 드나들며 우리의 인생은 서글프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허망의 문은 음부와 멸망의 문입니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 죽고 마는 문입니다. 아담이 상속해준 삶의 문은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갖다 주는 허망의 문입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11절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전도서는 진정으로 허무하고 절망적인 말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평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문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죽음이 입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립니다. 누구든지 어른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이 세상 인간이 사는 곳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또 헛된 것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조상으로 섬긴 우리가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문은 이처럼 헛되고 헛된 문입니다.

 우리가 오직 희망의 문을 드나들어 소망을 얻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희망의 문은 자유와 해방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해방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사망의 빚을 예수님께서 다 갚으시고 친히 우리에게 자유의 문과 해방의 문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0장 7절로 10절은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은혜의 꼴을 먹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내외적으로 묶은 모든 끈들을 다 풀어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죄책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두려움의 절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묶어놓은 이런 무시무시한 마귀의 밧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십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마귀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고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며,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항상 자유와 해방을 깊이 깨닫고 마귀를 대적해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됩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종교를 주기 위해서, 의식을 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을 얻으면 마음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충만하고 삶에 즐거움이 넘치는 것입니다.

 

 2.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삶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예수님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입니다. 예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이란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생각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꿈꾸고 입술로 고백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의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을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날 남녀, 노유, 빈부, 귀천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죄에서 용서받을 희망을 주기 위해, 허물에서 놓여나게 만들 희망을 주기 위해, 병든 자에게 치료의 희망을 주기 위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부자로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산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죽어서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온 전체가 희망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희망의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므로 영원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생각하고 희망을 꿈꾸고 희망을 믿고 희망을 말해야 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지고 좋아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기고 피흘려 절망적인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 고난을 참으시고 “내가 다 이루었다”하시며 결국에는 승리하신 것입니다.

 

 3. 아직 희망이 있다

 성경에 보면 열두 해 혈루병 앓은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더구나 혈루병은 문둥병과 같이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같이 있지 못합니다. 집에서 쫓겨나 성밖에서 혼자 격리된 생활을 해야 됩니다. 열두 해 병을 앓았으니 모든 재산과 살림살이도 풍비박산 났습니다. 이제는 절망밖에 없었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이제 자기 자신이 상여에 실려서 무덤으로 옮겨지는 것만 떠올라 죽음과 절망의 공포가 회오리바람 치듯이 가슴을 밀고 불어나갔으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절망과 좌절이요 원망과 불평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기쁜 소식은 절망을 쫓아내고 희망을 가져옵니다.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의 가슴은 희망으로, 마음은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나도 살 수 있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기대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입의 말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산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 만대도 나는 산다”는 긍정적인 고백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믿음과 입술의 고백대로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이며 소망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은 영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려주신 이 희망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각이 희망으로 가득차고 꿈도 희망으로 가득차고 희망이 넘치는 믿음이 생기고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희망을 전달해 주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절망에서 희망을 얻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복된 소식과 함께 희망을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희망을 주면 희망은 생각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꿈을 긍정적으로 갖게 만들어 주고, 기적을 바라는 믿음을 주고 생명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로 13절은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예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재앙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다가오면 이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므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꾸짖으며 대적해야 됩니다.

 주님은 미래에 희망을 주십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모레는 내일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늘 감사를 해야 될 것은 좋은 일은 좋아서 감사하고 좋지 않은 일은 하나님께서 좋게 만들어서 희망차게 만들어 주실 것임을 알기에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붙잡혔다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온갖 고초와 시련 끝에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굶주리는 자기 아버지와 집안 형제들을 애굽으로 다 불러 고센 땅에서 잘 살게 만들어 주었는데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자 형제들은 요셉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찾아와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하고 말하며 머리를 조아려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또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다”하고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요셉은 눈물을 흘리며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였었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변하여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 나를 국무총리가 되고 온 중동을 살리는 아비가 되게 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시옵소서”하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처럼 ‘악을 변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과 환경 가운데 마귀가 아무리 많은 저주와 악을 가져오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악까지도 선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악이 적으면 선도 적고 큰 악이 오면 큰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 손에 들어오면 선으로 바꿔 주십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소망이 가장 우선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그것을 따라 기쁨이 충만하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소망은 예수님을 통해 오는 것이고 절망은 마귀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을 때는 죄책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공포의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절망을 짓이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절망을 걸머지고 절망을 다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깨어진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절망이 없어져버립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됩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 소망은 아무런 대가나 공로 없이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절대로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나 유교나 천도교나 마호메트교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음으로 나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의 빛 아래는 허망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앞을 봐도 희망이 있고 뒤를 봐도 희망이 있고 오른편을 봐도 희망이 있고 왼편을 봐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기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절망을 멸해버렸습니다. 우리는 희망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믿고 구하고 찾으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재앙이 아니라 희망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생각하십시오. 희망을 꿈꾸십시오. 희망을 믿으십시오. 희망을 말하십시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희망을 말하십시오. 희망은 지금도 다가옵니다. 우리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나아지고 내년은 올해보다 더 나아지고 절망과 죽음의 오늘이 이제 말할 수 없이 큰 희망의 날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희망 안에 있고 희망의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는 모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이 돼 이 땅을 살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삶은 죄와 저주, 절망과 질병으로 허망의 문으로 들어가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양의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희망의 문’이 열리게 되었음을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예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영과 혼과 육의 삼중축복이 온전히 이뤄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없는 것을 늘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믿고 바라보고 꿈꾸며 입술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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