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욕심과 파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여인이 자기의 분수를 넘은 과도한 욕심을 내므로 말미암아 한 나라의 경제 전체를 파탄으로 몰아 넣을 지경으로 비극을 가져온 사건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한 은행원이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 욕심을 부려 일확천금을 하려고 하다가 수많은 고객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은행에 수십 억의 손실을 입히고, 은행의 공신력을 떨어뜨리게 한 사건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한 외사촌 동생이 자기의 분수를 넘은 탐욕과 탐심으로 말미암아 사업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사촌 누나 집에 가서 도끼로 외사촌 누나와 그 조카들을 다 쳐죽이고 그리고 돈을 탈취해갔다가 자기도 쇠고랑을 차고 파멸을 자초한 사건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비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비극의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의 가슴속에 넘쳐나는 자기의 분수를 넘은 욕심 때문에 파멸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 속에 이와 같은 욕심이라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은 파멸의 씨앗을 심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했단 말씀이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 파멸의 근원을 에덴 동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었으니 진선 진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사람이 거할 에덴동산을 이렇게 좋게 만들어 놓으시고, 상함이나 해함이 없게 하시고 각종 열매맺는 실과나무가 나게 하시고,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아담과 하와를 지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관리하고 운영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지었을 때 인간의 관리자로서 운영자로서 우리 인간을 지었지 우리에게 주인으로서 짓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도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관리자로서 하나님께서 지으셨지 결코 우리는 주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이를 소유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 아담에게도 에덴 동산을 관리하라고 말했지, 에덴 동산을 소유하라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아는 실과를 나게 하시고 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한 것은 주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교훈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에덴 동산 관리는 네 마음대로 하되, 그러나 그 가운데 언제나 우리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선악을 아는 실과 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것만은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생활가운데 언제나 하나님께서 범치 못할 위험으로 와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루는 마귀가 와서 탐욕으로 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동산 중앙에 있을 때 마귀가 뱀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 거기에 하와가 대변자로 나와서 아니라 동산의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하노라고 했다. 그럴 때 뱀이 말하기를 너희가 이 실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시나니라. 여기에서 악마의 속삭임에 하와와 아담이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 악마의 속삭임은 사람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에덴 동산과 지구의 관리자로서 만족해야 될 것인데 자기의 분수를 넘어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심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욕심이 잉태하는 과정은 언제나 마귀가 와서 분수에 넘는 탐욕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두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분수에 맞도록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분수에 충실하고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분수를 부정직한 방법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더 높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사람이 하나님이 된단 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사람으로서 만족해야지 사람이 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한단 말인 것입니까? 여기에서 분수를 넘은 탐욕이 그 마음속에 심어진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는 과정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 유혹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되겠는데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가지고서 이것을 꿈꾸어 보았었습니다. 자기 상상력을 지배한 것입니다. 욕심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고 온 천지와 만물을 소유하고, 천지와 만물의 주인이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그 상상 속에 자기가 들어간 모습을 기억해 보고, 그래서 거기에 완전히 포로가 됐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와 같은 상상력으로 이제 선악과를 바라보니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어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게 보인 것입니다. 사람의 상상력은 무섭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를 범한 사람이 먼저 그 죄가 그 마음의 상상력을 지배하기 전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탐욕이 들어오면 그 탐욕을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새김질하고 새김질하여 그 욕심대로 이루어진 자기 모습을 영롱하게 바라보게 되고 그리고 난 다음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만 그 꿈에 사로 잡혀서 포로가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죄를 짓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이래서 욕심은 분수를 넘은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상상력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잉태되지 않은 여인이 어린아이를 해산할 수 없는 것처럼 욕심이 마음속에 상상력 속에 이루어진 모습으로 잉태되지 않고는 절대로 죄를 낳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인 나무를 바라보고 그 밑에서 그들은 상상력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어서 그들이 온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소유하는 자기들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난 다음 그 모습이 완전히 자기들을 점령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와가 손을 내밀어서 선악과를 따먹고 또 그것을 아담에게 주어서 먹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짓밟아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는 동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력 하에 있지 않겠다. 우리는 관리자로서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과 똑같은 주권자로서 행실을 하겠다고 달려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죄를 낳았습니다. 죄라는 것은 빗나가는 것인데, 완전히 인간으로서의 자기 분수를 잃어버리고 빗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회개를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동산 나무 뒤에 숨어있을 때 하나님께서 와서 찾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릴 사람은 찾지 않습니다. 심판하려면 그대로 심판해 버리시지 하나님께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만 하더라도 그만 뛰어나와서 하나님 발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이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랬다면은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았으나 그 죄를 죽여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죄가 장성하는 과정은 자기를 타당화할 때 죄가 장성합니다. 자기 죄가 옳다고 타당화하면 반드시 그로 말미암아 죄가 자라서 죽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타당화했습니까? 아담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지어서 내게 준 이 여자가 나를 꾐으로 내가 먹었지 내 스스로 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죄를 하나님에게 전과하고 하와에게 전과했습니다. 왜, 하와도 하나님이 지어서 내게 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와의 꾀임을 통해서 이 선악과를 먹었음으로 하나님 책임이다. 하와는 또 자기 죄를 타당화했습니다. 뱀이 나를 꾐으로 그러므로 내가 선악과를 먹었나이다. 자기들의 죄를 죄로 고백하고 회개했으면 죄가 죽었을 것인데 그들은 죄를 짓고 난 다음에도 죄지은 자기를 끝가지 타당화한 것입니다. 죄를 타당화 시키면 죄가 자랍니다. 죄가 장성하면 그 다음 자동적으로 사망을 가지고 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었습니까? 그들이 죄를 타당화한 결과로 아담과 하와가 얻은 벌거벗은 수치에,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됐었습니다. 그뿐아니라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회오리바람처럼 쳐 몰아오고, 심판으로 말미암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게 되고 그들은 땀을 흘려야 먹고살다가 몸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여인은 해산의 수고를 하게 되고 이 세상에 오늘날 보는 인생고가 거기에서 다 다가오게 됐으니 이것은 사망의 열매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이 처참한 사망, 이 사망의 가장 근원이 욕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여러분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꾸 그 결과만 가지고서 왈가왈가 해봤자 소용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도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싸우는 것도 탐욕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나 가정이 파괴되는 것도 탐욕과 욕심 때문에 파괴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것도 욕심과 파괴 때문에 분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의 분량과 분수를 지키게 될 때 인간은 사망을 피할 수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회와 세계에 다가오는 광범위한 무서운 사망의 파괴가 그 근원적으로 사람의 가슴속에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는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그 탐욕은 사람이 가져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가져온 것도 아니라 마귀가 마음속에 속삭인다는 것을 알아야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왔다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데 마귀가 와서 갑자기 창검을 들고 와서 우리를 찔러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탐욕을 속삭여 주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15장 13절로 23절에 사울 왕의 파멸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이스라엘에서 준수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택하셔서 사무엘을 보내셔서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그는 성전에 성전을 가져왔고, 이스라엘의 국기를 튼튼히 했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셔서 사울에게 말했었습니다. 사울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하려고 가나안에 못들어 오도록 ...
... 아말렉을 기억합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힘을 얻었으니 나아가 진멸하되 그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새끼까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사울이 이 명령을 받고 군대를 동원해서 아말렉을 치러나갔는데 이미 이겨놓은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겠다 하셔서 전쟁이 일어나자 말자 성전에 성전을 계속해서 파죽지세로 밀어서 아말렉을 진멸하고 그 왕 아각을 잡았었습니다. 그래서 전승한 것은 좋은데 하나님께서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새끼까지 진멸하라, 그렇게 말씀했는데 그만 욕심이 잉태했습니다. 그것이 인제 문제입니다. 왕을 사로잡고 짐승들을 다 진멸하고 사람을 도륙을 하고, 하는 과정을 보니깐 소와 양떼들이 살이 찌고, 득실득실한게 참 좋거든, 그러니깐 백성들이 하는 말이 왕이여 아이 사람들이 죄가 있지 짐승들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소와 양떼들을 다 죽인다는 것은 너무 아깝고 어리석으니깐 이것만 나누어도 우리다 거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건 죽이지 맙시다. 그리고 또 이중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탐욕이 들어오자말자 우리 하나님께 제물 드리기 위해서라도 이를 진멸해서는 안되겠다. 백성의 입술을 통해서 말한 마귀의 음성에 사울이 그만 귀를 기울이고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아 왕으로부터 모든 짐승의 새끼까지 진멸하라고 했는데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왕 아각을 사로잡아서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서 끌고 그 다음 소와 양의 모든 살찐 것을 하나도 없이 모두다 사로잡아서 거대한 양과 소의 떼를 가지고서 의기양양해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벌써 하나님은 사울에 대해서 완전히 분노하고 말았었습니다. 사무엘에게 나는 사울을 택해서 왕 세운 것을 후회한다. 이제는 저를 왕으로서 존속시키지 못하겠다. 왜, 욕심이 잉태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거대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었었습니다. 그 소와 양 무리를 가지고서 얼마나 부자가 될 수 있느냐? 그래서 그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이 하지 마라고 한 것을 분수를 넘어서 자기 처신을 넘어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하나님 명령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또다시 여기에 욕심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짓밟아 버립니다. 자기가 인생의 관리자라는 것을 모르고 주인 행세를 합니다. 주인이 명령한 것을 짓밟아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므로 말미암아 종이 주인의 행세를 하고 관리가 소유자의 행세를 합니다. 이래서 사울은 주인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관리자로서 순종해야 될 것인데 주인의 말을 짓밟아버리고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가 잉태되었었습니다. 욕심이 잉태되어서 벌써 불순종의 죄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낳았는데 이것도 곧장 회개를 하면 좋겠는데 사무엘이 찾아와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어찌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나이까. 그때에 사울이 말하기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해서 나가 진실로 아멜렉을 도말하고 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러면 왕이여, 뒤에 들리는 소와 양 무리의 울음소리는 무슨 소리이니까? 아, 그거 말입니까? 그거는 백성들이 소와 양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또 저 살찐 것을 잡아다가 여호와께 제사드리면 좋다고 그렇게 권면하므로 내가 양과 소를 잡아서 오도록 하고 아멜렉의 왕아각도 잡아서 끌어오고 있습니다. 변명을 했습니다. 주인의 꾸짖음이 있을 때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통회하고 자복하면 죄가 죽어버립니다. 그러나 욕심이 잉태하는 죄를 낳아서 주인의 권세를 짓밟고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다가 그 다음에는 죄를 타당하다고 변명하기 시작하면 그 죄가 이제는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이러므로 불순종을 계속하고 불순종을 변명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입을 통해서 심판했습니다. 사무엘이 가뢰되 여호와께서 번죄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함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을 사신의 죄와 같고 완고하는 것은 사신 우상에 절하는 것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주인을 버리면 주인도 우리를 버립니다. 우리가 주인의 명령을 짓밟아 버리면 우리가 이제는 관리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우리의 생활에서 십일조와 헌물을 반드시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우리의 물질생활에서 하나님의 주권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물질생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짓밟아 버리면 이제는 우리 물질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우리가 주인입니다. 우리가 관리자의 행사를 했다면은 하나님의 사업을 잘 관리해서 그 중에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주인의 축복을 받겠지만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주인된 것을 거부해 버리고 십일조를 도적질 해버리면 이제는 관리자가 아니고 우리가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와는 종적인 관계에 있지 아니하고 횡적인 동등의 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교제는 끓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각합니다. 우리가 십일조와 헌물을 내어도 좋고 안 내어도 좋다는 이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주인의 위치에 있을 것이냐 관리자의 위치에 있을 것이냐, 이 중대한 문제가 하나님의 권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울왕은 관리자로서 인생을 살지 않고 주인으로서 행사하려고 하다가 쫓겨나고 말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과 파멸을 이르는 길을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욕심을 넣어주는 악마의 말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악마는 와서 여러분과 나에게 우리의 분수를 넘어서 주인 행세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다 관리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조용기는 목사로 불렀었으면 나는 목사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대교구장이나 교구장으로 부르셨으면 그 위치에서 하나님이 분량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 분량대로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자기 분량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또 우리의 조장, 구역장, 평신도로 부르신 여러분은 교회에서 여러분의 위치와 분량을 지켜야 되고 그 분량을 뛰어넘으려고 할 때, 벌써 관리자로서 인생을 살지 않고 주인으로 행사하려고 하다고 쫓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의 사업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 복을 주신대로 그 분량을 지켜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나간다면은 우리 하나님께서 점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축복을 해 주실 것인데 그만 자기 분량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탐심을 갖다주는 욕심의 말을 들어가지고서 그래서 자기의 분수를 뛰어넘고 하나님 말씀을 짓밟아버리고 일어나서 분수에 넘친, 분량에 넘친 그런 일을 하려고 할 때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고 그 다음 그 죄가 점점 장성하면 비극에 비극을 연출하는 사망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절대로 자기의 분수를 넘는 일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와서 여러분의 귀에 아름답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네가 조금만 부정을 행하면, 네가 조금만 자기의 분수를 넘으면 이것보다 더 잘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분수를 넘어라. 이래서 너의 분수를 넘고 하나님 말씀을 조금만 반역하라. 그래서 그 유혹의 욕심을 계속 듣고서 그렇게된 자기의 모습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면 욕심이 잉태되고 그 다음에는 거역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분수를 초월해서 남의 직위를 탐하게 되고 남의 물건을 탐하게 되고 남의 생활을 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벌써 자기 분수를 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 하라고 했는데 나는 이 일이 싫습니다. 다른 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은 관리자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관리자의 위치를 떠나 버리면 인생은 파멸합니다. 절대로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그 주인 앞에 우린 관리자로서 인생을 보내는데 여기에서 관리자로서의 우리 인생을 잘 살지 못하고 주인의 명령에 거역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고 했는데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은 이 사람은 잠시동안 내던져 놓았었으나 나중에 주인께서 쓸모 없는 자들을 끌어 모아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영원히 불태워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반역도를 하나님께서 살려놓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우주의 쓰레기 더미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만유의 주님께서는 오늘 마지막 때 우리 구주 나사렛 구주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아 피를 흘리게 하시므로 예수를 통해서 남녀노유 빈부귀천할 것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명령을 했는데 관리자인 인생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순복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는 생활로 들어올 때 그는 하나님이 예비한 영원한 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지, 사람이 무엇이 간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욕심을 잉태해서 죄를 내었으면 그 다음 죄를 장성케 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죄인 줄 알고, 죄 지은 줄 알았으면 죄에 대해서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죄를 타당화하면 안됩니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됩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주의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회개하라는 것은 회개만이 죄를 죽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를 타당화하면 죄가 자라서 무서운 사망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죽이는 유일한 글은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경은 여러분, 이사야서 55장 6절로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께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가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여러분을 영접해 주시고 여러분이 저지른 그 죄악이 이제는 자라서 사망으로 가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그를 멸해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순종과 본연의 분수를 찾아서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고 사랑으로 살아가면 우리 주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붙들어 주셔서 인생에 하는 일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축복 받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욕심의 결과는 크고 작은 수치와 불안과 파괴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공명을 다 얻고 난 다음에도 그 마음속에 평안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욕심이 잉태돼서 분수를 넘어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그가 직위와 명예와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 마음속에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을 빗나가서 죄를 짓고 죄의 결과로써 사망이 다가오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평화가 없습니다. 행복도 없습니다. 천하를 다 가지고도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은 천하를 얻은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인생사의 절망은 욕심의 결과로 다가오는 대가인 것입니다. 욕심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가 우상숭배입니다. 왜, 탐심을 가지면 벌서 하나님을 주인으로서 거역하고 관리자로서 종으로서 인생을 살지 않고 주인으로서 우상을 숭배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한 것입니다. 참 행복과 마음의 평화는 각기 준수를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이 곳에 믿음 소망 사랑이 넘쳐나고 마음속에 평화가 강물같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관리자인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욕심은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옵니다. 지극히 적은 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큰 일까지 인간이 파멸된 것은 마귀가 속삭이는 욕심 때문에 탐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의 분수를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우리에게 분량대로 삶을 주셔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포도원의 일꾼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관리자로서 인생을 살고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고 살게 도와주시옵시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자기의 관리자의 위치를 뛰어넘어 주인의 행세를 하기 위해서 분수를 뛰어넘은 행동을 하거나 명령을 짓밟아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욕심이 잉태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고 죄를 타당화하고 변명하면 자라서 처참한 사망을 낳게 되는 것이 우리 아버지여, 모두다 우리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또다시 용서를 받고 씻음을 받고 구원을 받고 새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