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한일서 4장 7∼12절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로 통해 나타나신 사랑
사랑의 생각, 말, 행동 실천해야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마다 사랑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샘물이 있으면 바깥으로 그 샘이 흘러 넘쳐 나오듯이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불리우던 테레사 수녀는 1910년 건축업자이며 시의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나 18세에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캘거타로 건너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나중에 그 고등학교 교장 선생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리야 산에서 요양을 한후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일생을 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돈으로 5루피를 들고 인도 캘거타의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가 돌보았습니다.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수상축하연을 열지 않고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쓴다는 조건으로 수상식에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그녀가 실천한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신지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는 1875년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목사로 대학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바하 음악에 심취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9살 때 그는 우연히 기숙사 책상위에 놓인 잡지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마음이 극히 아팠습니다. “우리는 구라파에서 이렇게 문명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불공평하기 짝이없다. 내가 가서 도와 주겠다”라고 고백하며 사명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후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에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기로 유명한 랑바레네라는 곳에 병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했습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그를 찾와서 “저는 정말 이해할수 없어요. 훌륭한 의사요, 위대한 학자인 당신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저는 말로써 감동시킬 만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에 와서 의술을 통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므로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52년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많은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하여 그가 탄 기차에 올랐습니다. 특등실에 가서 보니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1등칸과 2등칸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해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탄다는 3등칸에 갔더니 슈바이처 박사가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청진기를 대고 진찰과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기자들이 놀라서 “박사님! 상을 받으러 가는 이때에 가시면서까지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이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천민들이 타는 기차칸에서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볼수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머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 인생들을 돌보시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역사하는 그곳에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모습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와 더러움, 병, 저주, 죽음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해 나타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더러움을 몸소 짊어지시고 병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당하시고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매달린 형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서 강물처럼 넘침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의 모든 죄의 부채를 청산하시고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리게 한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함을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씁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키발드 디 하트는 용서란 나를 해친 사람에게 내가 원수 갚을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그를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갚는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그 끝없는 사랑에 우리는 감격하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원수가 잘못되는 것과, 원수가 심판 받기를 원하며, 원수가 불행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용서받고 남을 용서 안한다면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생애 속에 효과를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용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믿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햇빛을 받으면 반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사 안하는 거울은 거울이 아닙니다. 그처럼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를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 용서하라고 오늘날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마음 속에 받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요한일서 4장 11절로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오시면 사랑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사하여 주시는 속성이 있습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미워하는 사람은 자꾸 발가벗기고 다투고 논쟁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물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을 보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을 못살게 굴고 이웃의 약점을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내면서도 본인에게는 “나는 잘믿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을 감싸고 사랑하고 덮어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대경을 하나 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확대경은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멀리 적게 보이게 하는 것과 아주 가까이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과 단점은 멀리 보십니다. 장점은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쏟아부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확대경을 들고서 내 장점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장점을 보시고 사랑 해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묶여 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병에 묶여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가난과 저주에 묶여서 종살이 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은 심신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름은 야훼 라파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그의 사역의 3분의 2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유언으로 남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치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출신의 호세 까레라스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전세계가 알아주는 삼대 성악가 중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은빛 테너라고 불리우는 그는 한때 불치의 병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악가로서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그의 나이 41살 되던 해에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한참 연습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에 실려가서 조사해 보니까 치명적인 백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살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성경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동안 성경은 읽지도 아니하고 그저 의무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고통가운데 처하게 되니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의사들이 포기하고 이제는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나는 너의 의사’라고 말하니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찬송하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골수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도 믿음으로 잘 견뎌내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백혈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까레라스는 자신이 다시 살게 된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감사하고 전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까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워서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지에도 지사를 두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치료의 은총을 베푸는 선한일을 했습니다. 비로소 까레라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된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 나보다 남을 생각할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신을 치료하실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성은 또한 용기와 희망과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한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이시며, 복이시고, 하나님은 은혜이신데 하나님께 나가서 복을 안받으면 누구에게 복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당당히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복을 받을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용기요, 희망이요,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영생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시간 저 건너편 영혼으로 이 제한된 공간 저 건너편 무한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살다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바울선생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가 비로소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있고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미움은 마귀의 속성이기 때문에 미움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미움이 가져오는 파괴의 행동이란 얼마나 무섭습니까? 미움은 마귀의 형상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안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이상 미움은 물러가고 사랑이 들어온 것을 감사합니다. 미움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사랑의 태양이 떠오른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생각을 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사랑 안에서 참 평안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